황대권 | ‘야생초 편지’저자

토끼 사냥이 끝나면 토끼를 잡은 사냥개를 버린다. 한나라 유방이 천하를 평정한 뒤 가장 큰 공을 세운 신하 한신을 없애버린 데서 나온 말이다. 아마도 토사구팽은 정치와 관련된 뒷담화를 좋아하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고사성어가 아닐까 싶다. 인간사회에서나 있는 줄 알았던 토사구팽을 최근 우리집 닭장에서 보며 사회성을 가진 동물들의 보편적 특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닭을 키울 때 한 공간에 수탉 한 마리에 암탉 열 마리 정도 넣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처음 닭을 받아올 때부터 암수 비율이 맞지도 않았을뿐더러 중간에 이런저런 사고를 당하다 보니 한 공간에 수탉 네 마리와 암탉 네 마리를 키우게 되었다. 당연히 수탉들 사이에 치열한 서열 다툼이 일어났다. 처음부터 가장 덩치가 크고 기세가 좋은 노란 장닭이 왕노릇을 하기에 그냥 그 체제로 가는가 했는데 어느 날 아침에 모이를 주러 갔더니 2인자였던 회색 닭이 왕이 되어서는 노란 장닭을 구박하고 있었다. 객관적 전력으로 보아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어쨌든 서열이 바뀌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녹색세상]토사구팽

이후 노란 장닭은 서열 1위를 되찾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서열 3위인 검은 닭과 1위 회색 닭 사이에 무시무시한 전투가 벌어졌다. 서열 3위와 4위는 자체 부화로 태어난 새끼였는데 어느덧 자리싸움을 할 정도로 컸다. 말하자면 자신의 아비와 권력투쟁을 한 것이다.

검은 닭은 아직 완전히 크지 않았지만 스피드와 점프력이 대단했다. 그 전투에서 서열 1위 회색 닭은 처참하게 깨지고 만다. 벼슬이 찢어져 너덜거리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꿩 잡는 게 매라고 싸움에도 상대가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재미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보통은 최고 두목을 꺾은 놈이 서열 1위가 되어야 하지만 검은 닭은 회색 닭을 꺾었을 뿐 노란 장닭과는 애초부터 상대가 되질 못했다. 다시 노란 장닭의 세상이 되었다. 회색 닭은 새끼에게 패배한 뒤로 기가 죽어서 예전에 이겼던 노란 장닭에게 대들 엄두를 못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무참하게 패배시킨 검은 닭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꼼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노란 장닭은 적수가 없다. 마음 놓고 독재권력을 행사한다. 예전보다 훨씬 가혹하게 수탉들을 못살게 굴었다. 특히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회색 닭을 물리친 검은 새끼 닭을 얼마나 핍박하는지 아예 밥도 못 먹게 했다. 저러다 굶어 죽겠다 싶어서 검은 닭은 다른 공간에 격리시키고, 회색 닭은 아랫마을 아주머니가 수탉이 필요하다고 하여 주어버렸다. 노란 장닭이 검은 닭을 사주하여 라이벌을 제거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발생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결과는 전형적인 토사구팽이었다.

정치권만큼 토사구팽이 횡행하는 곳도 없지만 요즘 돌아가는 형국이 꼭 우리집 닭장 같아 기분이 씁쓸하다.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노란 장닭이라면 통합진보당의 내부 갈등은 회색 닭과 검은 닭을 닮았다. 섣부른 예측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느낌상 결론은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이것을 자연의 질서라고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다. 그렇게 잡고 잡히면서 한 세상 흘러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인간을 닭보다 차원이 높은 존재로 본다면 이런 식의 진행과정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잘못하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불태워버릴 수도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반공은 사상이 아니다. 21세기에 다시 부는 반공 히스테리가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우리 사회 사상의 지형도를 황량한 벌판으로 만들고 있다. 인간은 안전한 공간에서 사육되는 닭과 달리 숲과 계곡과 들판이 어우러진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살고 싶어 한다. 저쪽 사회가 황량하다 하여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대처하다 보면 사상의 동물인 인간을 그야말로 닭장 속에 갇힌 닭으로 만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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