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노씨의 비자금, 지리멸렬한 로맨스

한윤정 문화부 부장

요즘 젊은 연인들은 헤어질 때 그동안 주고받았던 선물을 모두 정리해서 상대에게 돌려준다. 받을 때는 좋았지만 이제 끝났으니 계산은 확실히 하자는, 아주 쿨한 태도다. 상대방에게 주지 못한다면 버리거나 바꾸기라도 한다. (백영옥의 소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모임>을 보면 참가자들은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각자 옛 연인에게 받은 물건을 내놓고 제비뽑기로 교환한다.)

최근 다시 불거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는 젊은 세대의 감각에 빗대볼 때 지리멸렬한 로맨스다. 연애는 끝났는데 받은 건 돌려줄 수 없다는 구질구질함의 극치다. 역사는 인정하지 않지만, 이들은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월의 광주항쟁 무력 진압, 체육관 선거를 통한 정권 장악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주장해 왔다. 민주화가 문제가 아니라 혼란을 틈탄 공산화의 위협을 막아야 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체제를 지탱해준 살육과 독재, 탄압이라는 상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차 아물거나 잊혀졌고, 최근에는 전두환 통치기의 경제성장과 노태우 집권기의 북방정책 성과에 대한 조심스러운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공감]전·노씨의 비자금, 지리멸렬한 로맨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통치를 비자금이라는 달콤한 과실로 환원시켰다. 필리핀 마르코스의 독재가 부인 이멜다의 수백 켤레 구두로 남았듯이, 이집트 무바라크의 철권통치가 자녀들의 호화주택을 장식한 황금으로 증명됐듯이 전두환·노태우 통치의 결과는 비자금이다. 재판을 받고 재산환수 명령이 내려진 뒤에도 남은 돈이 한푼도 없다고 발뺌하고 여전히 호화생활을 이어가면서 자신의 여생과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국가 지도자였던 위신에 아랑곳 없이 비자금을 감추고 빼돌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씨가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차렸다는 사실은 비자금 문제를 환기시켰다.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회사 설립시기가 2004년 비자금 일부가 드러난 때라는 점만으로도 아버지가 챙긴 비자금을 관리하기 위한 조치로 의심 받기에 충분하다. 그 돈은 전재국씨가 설립한 시공사와도 어떤 식으로든 연계돼 있을 것이다. 업계 5위인 이 회사는 대규모 자본투자를 통해 고급 인문·예술서적을 출간하고 사업 다각화를 꾀했다. 출판계에서는 시공사 자금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일 것이라는 풍문이 돌았으나 20년 이상의 건실한 운영을 통해 그런 이미지를 씻었다. 그러나 비자금 의혹이 다시 불거진 상태에서 시공사는 어떤 명분으로 우리 정신문화를 지배할 수 있을까.

노태우 전 대통령의 추문도 끊이지 않는다. 그의 운전기사인 정모씨와 동생 회사 직원들의 통장에서 출처가 불분명한 수십억원의 돈이 다시 발견됐다. 그가 통치기간 중 뇌물로 받아서 조성한 비자금은 상당 부분 환수되고도 수백억원이 남았다. 이미 권좌에서 물러나고 병석에 누운 지 오래 됐지만, 주변 사람들에 의해 이리 저리 분산돼 관리하는 돈은 계속 검찰의 추적을 받으면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있다.

권력은 무상하고 돈은 영원한 것인가. 이들이 권력을 잡았던 건 이미 한 세대 이전의 일인데도 돈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672억원, 노태우 전 대통령은 231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한 상태다. 일부 보수층을 중심으로 5·18을 폄훼하는 움직임과 함께 두 전직 대통령의 부정축재가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역사는 언제까지 1980년대의 언저리에서 계속 맴돌 것인가. 미납금 추징시효가 10월로 다가오는 가운데 사법당국의 강력한 의지와 함께 당사자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전직 대통령들이 법을 지키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주춤거리는 역사가 전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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