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살 비정규직의 죽음

이병철 시인

스물네 살 봄, 벚꽃이 핀 캠퍼스를 걸으며 시를 썼다. 꽃그늘 아래서 세상은 그저 아름답고, 아직 오지 않은 생의 비극들마저 만만했다. 스물네 살 여름에는 전남 완도로 무전여행을 떠났다. 8월 절정의 폭염도 별것 아니었다. 푸른 바다를 달리는 은빛 물고기처럼 맹렬하게 청춘을 헤엄쳤다. 스물네 살 가을에는 짝사랑을 떠나보내며 단풍처럼 붉게 울었다. 세상이 다 불탄 줄 알았지만, 열병 지나니 새로운 사랑이 첫눈처럼 왔다. 스물네 살 겨울에는 아무도 걷지 않은 숫눈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내일을 향해 걸었다. 스물다섯, 스물여섯, 서른의 빈 지도를 꿈과 사랑의 등고선으로 채워나갔다.

[시선]스물네 살 비정규직의 죽음

누구에게나 스물네 살의 기억이 있다. 우리는 모두 스물네 살을 지나온 사람들 혹은 지나갈 사람들이다. 삶이 스물네 해에서 멈출 것이라고 상상해본 적 없다. 그 무렵에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소중한 이들의 응원 속에 꿈을 펼치며, 실패하면서도 다시 일어나 성숙해지는 과정이었다. 엄혹하고 고된 하루를 내일의 기쁨으로 바꾸는 꽤 정직한 거래이기도 했다. 그런데 사회는 어느 스물네 살 청년에게만큼은 지나치게 가혹했다. 그에게서 목숨과 꿈과 내일의 약속과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앗아간 것은 죽음이 아니라 바로 사회다.

스물네 살의 삶은 멈추었지만 컨베이어벨트는 24시간 돌아간다. 그 빌어먹을 기계 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린다. 화력발전소를 가동시키는 건 석탄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목숨이다. 죽음을 연료 삼아 돌아가는 발전소는 비극을 생산하는 지옥의 공장일 뿐이다. 2010년부터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12명의 하청업체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노동자들은 무려 28차례나 시설개선을 요구했지만 묵살당했다. 김용균씨는 매일 밤 홀로 캄캄한 작업장에서 컨베이어벨트에 낀 기름때를 목숨으로 닦아내야 했다.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불빛 찬란한 대로를 걷는 동안 그는 좁고 어두운 통로 속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와 우리는 과연 같은 세상에 살았던 걸까.

두 해 전, 지하철 스크린도어 수리 중에 전동차가 들이닥쳐 외주업체 직원이 사망했다. 숨진 김군은 열아홉 살이었다. 그의 가방에는 컵라면과 공구가 들어 있었다. 밥도 못 먹고 종일 강도 높은 작업을 혼자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전동차를,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사회는 전동차보다 더 무섭게 김군을 윽박질러, 쫓기듯 몸을 맡긴 곳이 그 비좁은 스크린도어 안이었으리라. 그는 생일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영원히 오지 않는 그 아침이면, 컵라면 대신 어머니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김씨와 김군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문득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가 떠올랐다. 그 시를 나는 이렇게 바꿔 읽는다.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두려움을 모르겠는가, 눈을 뜨면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꿈을 버렸겠는가,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린 새빨간 전구 불빛에 소원도 그려보지만…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왜 사랑을 모르겠는가,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등 뒤에 터지던 부모님의 울음…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목숨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을…”

명복을 빈다는 말조차 못하겠다. 최선을 다해 산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내일이 나에게는 거저 주어질 거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용광로의 열기에 몸이 타들어가는 노동을 마치고 발전소를 나서면, 살을 에는 겨울바다의 추위가 칼날처럼 박혀들었을 것이다. 부디 뜨겁지도 춥지도 않은 영원한 스물네 살의 봄볕 속에서 편히 쉬시기를 빈다. 그곳엔 사람보다 더 중요한 기계도, 부당한 작업지시도, 비정규와 정규를 나누는 차별도 없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건 살아남은 우리들의 몫이지만, 왠지 자신이 없다.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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