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라는 공포

백승찬 사회부 데스크

2800년 전쯤 쓰인 고대 서사시 <일리아스>를 읽었을 때 놀란 점 중 하나는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과 공포 영화를 방불케 하는 처참한 죽음 묘사였다. 예를 들어 <일리아스>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이는 장면은 이렇게 묘사된다.

[백승찬의 우회도로]‘전쟁’이라는 공포

“오른손으로 휘두르는 날카로운 창에서 광채가 번쩍였다. 아킬레우스는 가장 적당한 곳을 찾아 그의 고운 살갗을 살폈다. (…) 쇄골이 어깨에서 나와 목을 감싸고 있는 부분, 즉 목구멍만은 드러나 있었으니 그곳은 치명적인 급소다. 바로 그곳으로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덤벼들어 창을 밀어 넣자 그의 부드러운 목을 창끝이 곧장 뚫고 나갔다.”

<일리아스> 속 숱한 죽음은 통계 숫자로 뭉뚱그려지지 않는다. 전사자 개개인에게 모두 처절한 죽음의 정황이 주어진다. “오른쪽 엉덩이를 치자, 창끝이 곧장 방광을 지나 치골 밑을 뚫고 나왔다” “한 사람은 청동 날이 달린 창으로 젖꼭지 위를 찔러 죽였고 또 한 사람은 큰 칼로 어깨 옆 쇄골을 쳐서 어깨를 목과 등에서 갈라놓았던 것이다” “그의 허벅지를 찌르니, 그곳은 사람의 몸에서 근육이 가장 두꺼운 곳이다. 창끝에 힘줄이 끊어지자 어둠이 그의 두 눈을 덮었다”는 식의 죽음 묘사가 1만5000여행에서 이어진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으로 몸을 다지고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는 현대인들에게는 낯설겠지만, 이처럼 전쟁은 매끈한 육체를 조각조각 찢는다. 어제까지 누군가의 친구이자 가족이자 이웃이었던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도 죄를 묻지 않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의 본질은 청동기 시대와 현대가 다르지 않다. 군사사가 마이클 스티븐슨은 <전쟁의 재발견>에서 베트남전에 투입된 어느 고참병이 신병의 죽음을 목격한 순간을 전한다.

“총탄은 도널드의 어깨 위쪽을 관통하여 가슴을 뚫고 나왔다. (…) 도널드는 총탄에 맞고 바로 죽지 않았다. 입과 코 밖으로 창자가 삐져나와 걸렸다. 아마 총탄에 맞았을 때 기침하며 쏟아냈을 것이다. (…) 그를 보았다. 그는 17살 난 어린 친구였다.”

전면적인 전쟁을 겪지 않았다는 것은 내 삶의 큰 행운이다. 물론 북한과의 갈등 상황에 따라 ‘전쟁 위협’이 고조되거나 국지적인 무력 충돌이 있긴 했지만, 실제로 전면전이 벌어지진 않았다. 전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은 국가의 암묵적이며, 당연하고,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전쟁이 벌어지면 국가는 인력과 자원을 총동원한다. 과거 일본이 식민지 조선인들을 의사에 반해 징발한 것도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전시에는 전쟁에 반대하거나 정부에 이견을 표하기도 어렵다. 전쟁을 치르는 국가는 어떻게든 이겨야 하므로, 전쟁을 원치 않던 시민들도 전쟁에 힘을 보태거나 최소한 침묵하곤 한다.

많은 이들은 지금 ‘전쟁’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물론 무력을 동원한 전쟁은 아니고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 배제로 촉발된 한국과 일본의 경제적 갈등이다. 하지만 경향신문을 포함한 다수 언론, 정치권이 현재 국면을 ‘전쟁’이라 칭한다.

이번 조치는 일본이 물질의 대국일지언정 정신의 소국임을 보여줬다. 어려운 경제 여건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아직 이 ‘전쟁’으로 신체가 찢겨나간 사람은 없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도 없다. 다만 무력이 동반되는 전면전을 방불케 하는 수사, 전시처럼 획일적인 구호만이 난무할 뿐이다.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표하면 ‘이적’으로 몰린다.

어렵사리 한 걸음씩 진전시켰던 노동과 복지의 수준은 순식간에 물러난다.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주52시간 근로제 적용 시기를 사업장 규모에 따라 최장 3년 가까이 늦추는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정부는 신규 화학물질의 유해성 심사 절차에 대한 규제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상속세를 낮추자는 제안도 나온다. 엄중한 경제 요건을 들며 노조의 파업 자제를 촉구하는 정치권의 목소리도 있다. 헌법은 노동자가 파업할 권리를 보장하지만, ‘전시’에 헌법은 거추장스럽다고 여기는 듯하다.

2017년 타계한 스웨덴의 공중보건의 한스 로슬링은 <팩트풀니스>에서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에서 극빈층의 비율은 절반으로 줄었고, 오늘날 세계 거의 모든 아동이 예방접종을 받으며, 세계 인구 중 80%가 어떤 식으로든 전기를 공급받지만, 이러한 사실을 아는 이는 매우 드물다. 수십만년 동안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 생존을 도모해야 했던 인간의 뇌는 여전히 극적인 본능에 사로잡혀 세상을 오해한다고 말한다.

공포는 유용하다. 창에 허파가 꿰뚫릴 뻔하거나 부비트랩을 밟아 하반신이 날아갈 위험이 있을 때, 공포는 이를 경고하고 피하게 해준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다. ‘전쟁’이란 공포를 퍼트려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은 있다.


Today`s HOT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이·팔 맞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인도 스리 파르타샤 전차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시위대 향해 페퍼 스프레이 뿌리는 경관들 토네이도로 쑥대밭된 오클라호마 마을 페루 버스 계곡 아래로 추락 불타는 해리포터 성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