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은 못 된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평소 고까운 직장상사를 한창 욕하고 있는데 “누구 얘기들 해?” 그 상사가 불쑥 얼굴 들이밀면 전부 ‘으악!’ 식겁합니다. 호랑이를 마주친대도 이보다 간 떨어지진 않을 겁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속담이 성립되는 상황입니다. 만약 재수 없는 사람 이야기였다면 ‘까마귀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눈빛으로 쉬쉬했겠지요. 같은 자리에서 비슷하게 쓰이는 속담으로 ‘양반은 못 된다’ 또는 ‘양반 되기는 텄다’가 있습니다. ‘호랑이’가 윗사람이라면, ‘양반’은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한 이가 뒷말의 대상입니다.

“이보게들! 그 양반, 국자로 뺨 맞은 얘기 혹시들 아는가?” “어느 양반 말인가?” “누구긴, 거 살구나무집 그 양반이지.” “아아, 그 양반! 이번엔 또 무슨 수작질 하다 그리됐다던가?” “그 양반이 말이야, 제 버릇 못 고치고 장터 국밥집 아낙 희롱했다가 뜨거운 국자로 된통 맞았다지.” “하하하! 어디어디, 자세히 좀 말해보게.” “내가 저번 장날에 뭐 좀 사고 국밥 한 그릇 하러 갔는데 말이야. 그때 마침 그 양반이….” “야야 쉿쉿! 그놈 온다!”

느긋하게 말할 때는 ‘그 양반’이라 불러주지만 다급하면 바로 ‘그놈’ 됩니다. ‘그 양반’이 흘끔 쳐다보고 저만치 간 뒤에도 이야기는 곧장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한창 물오르던 게 싹 가라앉았으니 쓴맛 다시며 뭐라도 한마디 해야 다시 시작되니까요. 그때 하는 말이 대개 “거(그), 양반은 못 되네, 그놈”입니다.

이래서 연말모임 같은 데는 웬만하면 빠지면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 친구만 남겨놓고 화장실 가선 안 된다는 이유와 상통합니다. 자기 없을 때 뒷말 나오고 없는 말까지 나올 수 있기 때문이죠. 혹 늦게 왔는데 대화 뚝 끊겼다가 와하하! “야야, 너 양반 되기는 글렀다!” 하면 아직 안심해도 될 겁니다. 아직 쉬쉬 ‘그놈’까진 안 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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