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쳐도 된다’는 디지털 자신감

김태권 만화가
ⓒ김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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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푸념이다. “디지털 네이티브의 부모 노릇 하기가 어렵구나.” 나의 대답이다. “여섯 살 된 우리 큰애한테 색칠하기 책을 사줬어. 좋아서 칠하다 막 서럽게 울어. 왜 우나 보니까, 종이에 색칠한 걸 어떻게 지울지 당황했더라고. 아이패드 색칠하기 앱은 ‘언두(undo)’가 되는데 책은 안 되니까.” “ㅋㅋㅋ.” 친구는 웃었다. 마음 편한 웃음만은 아니었다.

[창작의 미래]‘망쳐도 된다’는 디지털 자신감

‘언두’란 실행취소 명령이다. Ctrl-Z랑 같다. 색을 칠하고 마음에 안 들면 언두를 눌러 색칠 전 상황으로 되돌린다. 빨강이며 파랑이며 마음에 들 때까지 칠해볼 수 있다. 이 방법이 손에 익은 여섯 살배기 디지털 원주민에게, 색을 선택할 때마다 루비콘 강을 건너듯 결단을 요구하는 종이책의 비가역성이란 잔혹한 것이다. 다른 친구의 넋두리다. “삶도 언두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책 한 권도 모자랄 주제련만, 지금은 창작 이야기로 돌아오자.

디지털 시대의 창작은 이전과 다르다. 옛날에는 망설임 없는 시원시원한 붓질이나 호쾌한 물감 뿌리기 같은 솜씨가 존경받았다. 초심자는 따라 할 엄두조차 못 내는 위험한 기술이었다. 살짝만 빗나가도 그림을 망치기 때문.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생초보도 자신 있게 붓질을 한다. 망쳐도 되니 그렇다. 언두 기능이 있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언두를 거듭하면 언젠가는 마음에 드는 결과를 얻는다. 언두가 창작을 바꾼 예다.

그런데 창작자는 청개구리 같은 사람이다. 누구나 할 수 있게 되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 “언두 덕분에 이제 다들 하잖아, 그러니 나는 안 할 거야.” 아이러니한 일이다. 음악은 어떨까. 과거에 음정과 박자를 정확히 맞추는 솜씨는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요즘은 음악을 들을 때 (라이브의 경우를 빼면) 음정과 박자를 옛날만큼 따지지 않는다. 지레짐작하기 때문이다. “녹음해 놓고 기계로 만졌겠지, 뭐.” 장르 불문하고 비슷한 사례가 많다.

기술이 발전하면 창작자는 편해질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취향 역시 변하기 때문에 적응이 힘들다. 반평생 갈고닦은 기량을 더는 쓰지 못하는 일도 잦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없다. 미래를 대비해 창작자로서 어떤 전략을 짜야 할까? 내가 자신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아이에게 스마트 기기를 쥐여줘도 될까? 종이책만 보게 하라는 충고도 자주 듣는데, 헷갈린다. 아이가 장차 어른이 될 때 매체의 표준이 종이책일까, 아이패드 비슷한 무엇일까? 일단 책도 태블릿도 쥐여준 채 나는 지켜본다. 창작의 미래에 대해 아이가 나를 가르치겠지 기대한다. 나와는 달리 디지털 원주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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