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에도 법이 필요하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

바야흐로 변화의 시대다. 예전에는 주로 국가나 체제, 이념과 같은 소위 거대담론이 변화의 주인공이었다. 이제는 그런 변화마저 변화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코로나 이후 일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을 만나는 일, 동료들과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일부터 회의 방식까지 거의 모든게 이전과는 판이하다. 혹자는 이제 시대구분을 코로나 이전(BC)과 이후(AD)로 나눠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진리만이 변화하지 않는 듯하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

시작에서부터 변화의 시대를 운운하는 이유는 비무장지대(DMZ)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학과 연구소는 물론 지자체, 부처들까지 심지어는 문화예술 단체들까지 DMZ를 연구와 기획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평화통일 문제를 고민해 온 필자로서는 격세지감일 수밖에 없다. 역대 정부마다 DMZ를 언급 안 한 정부가 없지만, 실질적으로 어떤 일이 진행된 적은 없었다. 군인들에게는 가까웠을지 몰라도 일반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가질 수도, 가져서도 안 되는 ‘금단의 땅’이었다. 며칠 전 유엔사는 그런 ‘금단의 땅’ DMZ에 방문신청 건수가 올해만 3800건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우리의 일상 풍경을 바꾼 것이 코로나라면, DMZ를 바꾼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남북이 DMZ를 평화지대로 만들자고 합의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DMZ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남북 간 합의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종료돼 남북관계도 휘청거리는 바람에 여러 남북 간 합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치열한 격전지였던 철원 화살머리고지에서는 유해발굴이 진행 중이다. 올해 8월까지 360여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우리 군 전사자 중 90%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제 시작일 뿐이다. 문화재청을 필두로 한 전문조사단도 실태조사에 착수했다. 판문점 옆 대성동 마을 조사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석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임진강 유역에 적지 않은 구석기 유물이 발견된 바 있어 그 지류인 사천(沙川)을 사이에 둔 우리 대성동과 북쪽 기정동 마을을 공동조사하게 된다면 더 큰 성과가 기대된다.

평화란 것이 꼭 거창한 것이겠는가. 전쟁으로 얼룩진 곳에서 과거의 상처를 되새기고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면 그것이 적어도 평화로 가는 어디쯤은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지속성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다가 말면 하지 않은 것만도 못한 법이다. 법과 제도라는 틀이 없이는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DMZ를 법적으로 규율하고 있는 것은 정전협정이 유일하다. 한반도의 군사정전체제라 하는 현 체제를 만든 바로 그 문서다. 문제는 이제 67년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을 멈추기 위해 체결한 것이어서 남북관계 변화, 우리와 주변국과의 관계 변화, 그리고 우리 정부의 변화된 위상을 담기엔 역부족이다. 당시에 정전협정을 체결한 그 누구도 한반도의 정전상태가 이렇게 길어질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남과 북이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자고 합의한 마당에 정전협정으로 이 이후의 활동을 이끌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목적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국회에서 비무장지대에서의 보전과 평화적 이용을 지원하는 법안이 발의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난 5월경에도 비무장지대에 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오던 필자로서는 눈이 번쩍 뜨였다. 유레카! 아직도 남북 간에는 정전이 지속되고 있으니 군사적 부문에서는 정전협정을 유지하고 비군사적 부문 특히 DMZ의 보전과 평화적 이용 부문만 따로 떼내어 그 활동을 지원하는 법을 만들자는 아이디어에 무릎을 쳤다. 그야말로 일석삼조가 아닌가. 정전체제로 인해 대한민국 주권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DMZ가 우리의 영토라는 점을 천명한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자못 크다. 게다가 모처럼 이뤄낸 남북 간 합의를 제도화한다는 점에서나, DMZ에서 진행되는 평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제도적 틀 속에서 지속해 나갈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의의라고 본다.

가을의 끝자락이 되면 DMZ를 가로지르는 철원평야에는 저 멀리 몽골과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두루미들의 세상이 펼쳐진다. 어린아이 키만 한 두루미들이 가족단위로 인적 드문 논밭을 제집 삼아 날아다닌다. DMZ법이 인간의 이기심에서 저 철새들을 보호하는 울타리도 될 수 있을까. 변화의 시대 첫 덕목은 인간과 철새, 사람과 동물이 함께 잘사는 공생하는 법부터 배우는 것이 아닐까. 부디 DMZ법에 그 공존의 지혜도 담겨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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