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가치

박진웅 편의점 및 IT 노동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지만, 경제적 자유를 위해 사람들이 근면하게 일하는 사회가 더 부유하고 건강한 사회가 된다는 주장이야말로 국부론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산업혁명 이후 사회 발전을 이끈 것은 근면·성실하게 일하고자 했던 노동자들의 피땀이라 할 수 있다. 열심히 일해서 더 나은 삶을 일구고, 나아가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서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시대정신처럼 이어졌다.

박진웅 편의점 및 IT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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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1890년대,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해 유럽에 떠돌던 유령의 이름이 공산주의였다면, 21세기 대한민국에 떠도는 노동자의 해방을 위한 유령은 재테크라는 이름이 아닐까. 투자하세요, 투자하지 않으면 바보입니다! 부동산, 주식, 심지어 가상통화까지! 일해서 먹고사는 시대는 끝났다며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노동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묘한 기대감이 생긴다.

부동산은 어느 때보다도 비싸게 고공행진 중이며, 주식시장도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가상통화는 어떤가? 도박 저리 가라 할 만큼 엄청난 폭으로 수익률이 널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1세기 일확천금의 환상은 미국 서부시대의 골드러시를 방불케 할 만큼 자극적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실한 노동을 통해 소득을 올리는 일은 뒷전이 되기 마련이다.

그나마 노동과 자산의 상관관계를 보장해주던 적금은 어떨까. “이자는 언젠가 사라져 버린다”는 케인스의 주장처럼 제로금리의 시대에 노동자들은 적금으로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다고 느낀다. 케인스는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를 이야기했으나, 21세기에는 노동자들이 안락사 직전에 몰려 있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보자. 적금을 쌓고 자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노동자들의 노동은 자연물로부터 상품 가치가 있는 재화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재화는 각자의 욕망과 맞물려 수요와 공급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곧 시장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경제체제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상품도 없다. 억만금의 화폐가 있다 한들 화폐로 쌀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도 임금보다 더 빠르게 오르는 집값과 자동화로 서서히 줄어드는 일자리, 나이가 들며 여기저기 아파오는 몸. 그럼에도 노후조차 대비할 수 없는 불안한 삶밖에 남지 않은 이들에게 노동은 그저 고통일 뿐이다. 하물며 청년실업률과 노인빈곤율이 모두 극도로 높은 지금, 근면·성실을 외치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가! 돈으로 돈을 버는 이들이 누리는 것들은 누군가의 노동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건만, 정작 그것을 만드는 노동자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있다.

주식시장으로, 부동산 시장으로, 가상통화로 사람들의 피땀 어린 소득이 몰리는 이유는 자명하다. 노동으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소수의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이전 시대의 격언처럼 근면·성실하게 일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일확천금 없이는 늘 불안에 시달려야만 한다. 성실히 일하는 건 미련한 짓이야. 일 안 하며 살고 싶어. 노동자들의 자조 섞인 이 한탄의 이면에는 일생을 근면·성실하게 일해도 막막한 미래가 기다리는, 희망 없는 현실을 드러낸다.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다마는 적어도 근면·성실한 인간이 희망을 잃지 않을 만큼의 부는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노동의 후한 보수는 인구 증가를 장려하면서 보통 사람의 근면을 증대시킨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1편 8장에 나오는 문구이다. 불안하고 높은 리스크의 투자시장으로 사람들이 몰리고, 노동이 점점 소외되는 세상은 보통 사람이 성실히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보상하고, 근면·성실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지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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