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선 묻지 않아요

최준영‘책고집’ 대표

근 20년 다양한 인문학 강좌에 참여했다. 정규 대학에서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거리의 대학’에선 인기 강사 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 덕분에 지금껏 연중 쉬지 않고 강의한다. 인상 깊었던 강좌가 많지만 그중 여성노숙인쉼터 강좌를 잊을 수 없다. 서울에만 40여곳의 노숙인쉼터가 있다. 이 가운데 여성노숙인쉼터가 몇 개나 되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단 잘 보이지 않는다. 주택가 한중간에 들어가 있는 데다 간판조차 달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여성노숙인쉼터의 간판을 다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최준영‘책고집’ 대표

최준영‘책고집’ 대표

내가 강의했던 곳 역시 주택가 한복판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비좁고 비탈진 골목을 오르다 보면 파란색 철제 대문집이 나온다. 그 집으로 일주일에 한 번 - 손님처럼 혹은 퇴근하는 가장처럼 - 불쑥 들어서면 그게 강의의 시작이다. 딱히 강의실이랄 곳도 없다. 거실에 밥상을 펴놓고 10여명이 둘러앉으면 그만이다. 강의라지만 거의 혼잣말을 하는 식이다. 도통 말이 없는 데다 질문을 극도로 경계하는 분들이다. 과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현재의 생활이 어떤지조차 물어선 안 된다.

한 달여 만에 첫 말문이 열렸고 그게 도화선이었다. 이후 듬성듬성 대화가 이어졌다. 일상적인 얘기가 대부분이었지만 더러 지나온 삶을 이야기하는 이도 있었다. 얼핏 보면 그저 착하고 순하고 조용하고 예의 바르고 수줍음 많은 이들이다.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노숙인, 그것도 여성 노숙인이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내고 있는 슬프고 괴롭고 외로운 사람이다. 깊은 상처를 입고도 치유하지 못한 채 조용히 신음하며 버티는 삶이다.

그날은 마침 노동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분이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휴대폰 케이스를 생산하는 공장에 다닌다. 일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런데 급여를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그 대목에서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왜 사장에게 따지지 않느냐고. 돌아온 대답이 어이없다. “사장님도 오죽 힘들면 그러겠어요.” 놀라울 따름이다. 더 놀라운 건 나 혼자만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함께 듣고 있었던 대부분은 되레 그의 얘기에 공감하는 표정이었다.

“관심은 고맙지만 그만 물으셨으면 좋겠어요.” 급여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가 들은 말이다. 거짓말 같은 현실이다. 그 거짓말 같은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또한 거짓말 같다.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어서 쉼터를 전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급여를 주지 않는 공장 사장을 두둔한다. 동료들은 그걸 그저 흔한 일이려니 치부한다. 부당함에 맞설 용기, 권리를 주장할 의지 따위는 내려놓은 지 오래다. 살았으되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이 아닌가.

비현실적인 현실을 사는 사람들과 꼬박 한 계절을 함께했다. 흔들리는 내 의식을 바로잡아준 사람 또한 그분들 중에 있었다. 이따금 통화하는 그분이 위로인 듯 결코 위로일 수 없는 말을 내게 들려주었다. “여기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에 관해서 묻지 않아요. 각자 비밀을 지키며 사는 거죠. 그걸 알려고 드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긴다는 걸 우리는 잘 알거든요. 최소한의 일이 조용히 사라지는 거고, 나머지는 상상에 맡길게요. 강사님 다 좋은데, 자꾸만 물으셔서 부담스러웠어요. 여기선 묻지 않아요.”

인문학은 묻는 학문이다. 자신의 내면을 향한 물음에서부터 세계를 향한 물음까지. 그러한 물음을 통해 길어 올린 것이 인문학적 사유다. 여성 노숙인 강의를 통해 인문학적 사유의 또 다른 면도 알게 되었다. 묻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의 결핍과 누군가의 상처를 덧내는 물음이라면 결코 물어서는 안 된다. 다른 방식의 소통을 고민해야 한다. 속절없이 묻는 대신 진득한 눈빛으로 말없이 오래도록 바라봐주는 것이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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