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어렵고 좁은 길

조광희 변호사
[조광희의 아이러니] 민주주의의 어렵고 좁은 길

김용민 의원이 지난달 3·1운동 정신을 왜곡하거나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면 처벌하는 ‘역사왜곡방지법’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욱일기 같은 상징물을 사용하는 행위도 금지한다.

조광희 변호사

조광희 변호사

누구나 알다시피 역사는 다양한 해석과 토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법안은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보안법의 반대편에 찍힌 데칼코마니다. 법안에 따르면, 왜곡과 찬양 여부는 ‘진실한 역사를 위한 심리위원회’가 판정한다는데, 어쩐지 중세의 이단신문소가 연상된다. 나 또한 일제를 찬양하고 독립운동을 폄하하는 발언이 불쾌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식민경험으로 이어질 거라는 위험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이 법안을 보면서, 내 의견이 별나면 언젠가 감옥으로 갈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분명해 보이는 이념과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가 거슬릴 수 있다. 하지만 불쾌한 것을 처벌하겠다는 발상은 전체주의로 이어진다. 가장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것 같은 이 법안이 실제로는 이 공동체의 한 기둥인 자유주의의 원리를 뒤흔든다.

이러다가 ‘6·25전쟁은 남침’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 만들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런데 그런 법에 법의 자격이 있는가? 만들어졌다고 모두 법은 아니다. 다행히 김 의원이 활동하던 민변은 “역사적 사실은 학계의 연구와 토론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국민의 역사인식은 처벌보다는 교육을 통해 형성·발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대중의 마음을 긁어주는 법을 만들 때, 발화자와 수용자가 느끼는 쾌감은 알겠다. 그러나 쉬운 정치는 얼마나 위험한가. 개인적 위험부담이 없는 선명성 경쟁에 편승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정치는 없다. 분별 없는 반일노선을 걸어서 정치인 개인이 잃을 것은 거의 없지만, 공동체는 잃을 것이 많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대의 길을 걸었다. 인기도 없고 논란도 많았던 일본대중문화 개방을 이끌었다. 이제 세계에 활짝 꽃핀 한국의 대중문화가 그와 무관할까.

대학시절 헌법 교과서에 적힌 ‘사상의 자유공동시장’과 ‘토론을 통한 민주주의’라는 말은 강의실 바깥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보이는 상황에서는 공허하게 들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교과서적인 신념이 귀하게 여겨진다. 마침 얼마 전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수십년 만에 다시 살펴보았다. 내게도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경험이 쌓여서 그런지, 열린 사회를 향한 그의 논리와 열망에 가슴이 뭉클했다.

어떤 노선을 걷든 그것은 자신의 자유다. 그러나 그 당찬 걸음이 타인과 힘겹게 토론하는 것을 회피하고, 법을 무기로 들고나오며, 포퓰리즘에 휘둘릴 때 사회는 좌우를 막론하고 전체주의로 이탈한다. 인류사에 끝까지 남을 독일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와 문화대혁명의 처참함을 보라. 우리는 이러한 전체주의가 청교도적 신념과 순수한 마음 그리고 역사에 대한 확신에서 발원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21세기 정치는 양극화되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의 전파자가 될 줄 알았던 인터넷이 소셜미디어의 폐해 때문에 민주주의의 수렁이 되고 있다. 선명한 주장은 사람들에게 쾌감을 주고 친구가 많다. 진실은 자주 무채색이고 무미건조하다. 균형 잡힌 포지션은 인기가 적고 편을 얻기 힘들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정치인의 의무다. 이 법안은 그 의무를 내동댕이치는 어리석고 뻔뻔한 시도다.

말꼬리나 잡는 싸움이 아니라 정책과 논리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정치문화가 발붙이고, 정치인이 존경받는 세상이 되며, 그래서 가장 품위 있고 탁월한 사람이 정치의 길을 걷고 싶어할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것이다. 홍콩과 미얀마의 시민이 부러워하는 우리의 정치지만, 우리는 아직 목이 마르다. 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도약이 곧 오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치주의와 자유주의의 이상을 깊이 이해하면서,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공동시장이 작동하는 어렵고 좁은 민주주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정치가 한국의 족쇄가 아니라 기관차가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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