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진화, 공정의 진화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약 15년 전 일이다. 취업난이 심했다. 한 가난한 남자가 쓸쓸하고 낡은 공원을 찾았다. 관리인도 없었다. 남자의 눈에 녹슨 동판이 들어왔다. 동판을 떼어 고물상에 팔았다. 어떤 도덕적 판단이 드는가?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실제 영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깟 녹슨 동판 때문에 불쌍한 남자를 구속해야 할까? 좀 봐주고 싶다. 든든하게 국밥 아니 피시앤드칩스라도 사주며 말이다. 우리는 종종 따뜻한 돌봄과 공감이 가장 중요한 도덕 가치라고 믿는다. 소위 ‘착한’ 것이 도덕이다. 착한 가격, 착한 소비, 착한 임대인, 착한 사장님, 착한 공무원…. 뭐,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너무 나갔다. 대체 착한 통닭, 착한 족발은 뭔가? 급기야 강간범을 덮치면 착한 강간이요, 연쇄살인범을 죽이면 착한 살인이란다. 이건 아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단지 ‘착함’으로만 정해지지 않는다.

영국 전역이 도둑에 대한 분노로 끓어올랐다. 사실 그 공원은 전몰 용사 묘지였고, 그가 훔친 것은 국가 유공자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었다. 도둑을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당시 영국엔 이른바 ‘메탈 도둑’이 기승을 부렸다. 전선을 끊었고, 철로 된 담장을 훔쳤다. 유서 깊은 교회의 오래된 종을 떼어 녹였다. 급기야 동물병원을 습격하여 우리도 뜯어갔다. 여덟 마리의 동물이 죽었다. 영국의 경제적 피해가 한 해 6000억원에 달했다.

공정은 도덕의 또 다른 범주다. 따뜻한 행동보다는 정직한 행동이 더 옳은 일이라는 것이다. ‘착함’ 기반의 도덕성은 필연적으로 사기꾼을 낳는다. 착한 행동이 과도한 보상을 받으면, 세상은 ‘착한 사기꾼’이 넘쳐나게 된다. 공정의 도덕이 이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하지만 과도하면 역시 역효과다. 공정이 도덕의 제1원칙이 되면 세상은 ‘공정의 칼’을 휘두르겠다는 ‘정의의 사기꾼’으로 가득해진다. 이 외에도 여러 도덕 범주가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도덕 전쟁은 주로 앞의 두 진영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약자와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같은 돌봄의 도덕성, 그리고 노력과 정직에 대한 보상과 같은 공정의 도덕성이다.

예산이 빠듯하다. 누구를 위해 써야 할까? 돌봄을 주장하는 사람은 불쌍한 이를 우선한다. 늙고 병들어 어려운 사람에게 생계비를 주어야 한단다. 그러나 공정을 주장하는 사람은 자활하려고 노력하는 이를 우선한다. 부지런히 뛰는 사람에게 장려금을 주어야 한단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원은 늘 부족하다. 우선순위를 둘러싼 정치적 싸움이 치열하다.

진화적으로 착한 돌봄의 도덕 정서는 친족 관계에서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주로 가깝게 느껴지는 이를 향한다. 가축보다는 야생동물의 상황이 훨씬 열악하지만, 가축 해방부터 부르짖는다. 심지어 친근한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불쌍하다며 걱정한다. 쓸데없는 연예인 걱정이다. 반면에 공정의 도덕 정서는 비친족 호혜 관계에서 진화했다. 거대한 사회를 만든 힘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당사자나 집단 전체에 보탬이 되는 이를 주로 향한다. 그러니 소위 ‘쓸모없는’ 대상에게는 가차 없다. 장애인이나 노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너무’ 공정하다. 우승열패의 오랜 신화다.

도대체 이런 갈등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도덕 판단이 ‘감정적 번뜩임’이라고 했다. 진화적으로 도덕은 감정이다. 감정은 종종 맹목적으로 폭주한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압도하면, 반드시 악용하는 자가 생긴다. 공정의 칼은 사기꾼을 향해야 하건만 정작 불쌍한 이가 칼을 맞는다. 돌봄의 손길은 어려운 이를 향해야 하는데 정작 사기꾼이 이득을 챙겨간다.

개인적으로 주변 사람은 나에게 더 착했으면 좋겠고, 잘 모르는 사람은 나에게 더 공정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같은 마음일 테다. 타협해야 한다. 감정은 타협에 서투르다. 이성의 정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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