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의 마지막 ‘한여름밤의 꿈’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정보분석가라면 새벽에 사이렌 소리가 나면 1차적으로 어디엔가 화재가 발생했거나 응급환자를 싣고 가는 것으로 판단해야 옳다. 그러지 않고 이를 화재예방훈련을 하는 것으로 오인하는 순간 정보실패의 늪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사전 인지 가능성’과 ‘조치를 취할 만한 정보’가 담겨 있었음에도 정책결정자가 이를 묵살한 나머지 국가안보에 막대한 피해를 야기했다면 이야말로 완전한 정보실패이다. 11년 전 천안함 피격 사건이 꼭 그랬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당시 기무사가 천안함 피격 이틀 전 북한 어뢰 함정이 서해기지를 빠져나온 징후가 있어 이를 보고했음에도 국방부 장관, 합참 등이 묵살했다는 문건이 최근 공개됐다. 군 수뇌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북한 잠수함의 기지이탈 정보를 사전에 탐지하고도 적절하게 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정보를 접한 시점에 무엇에 몰두하고 있었는지에 따라 정보를 인식하는 방식이 영향을 받는다고 할 때, 정권 말기의 국가안보 정책결정자들은 현재 무엇에 가장 몰두하고 있을까. 북한이 서랍 깊숙이 보관하고 있던 핵카드를 또다시 만지작거리고 있다고 하기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국제원자력기구 라파엘 그로시 사무총장이 최근 정기이사회에서 북한이 사용후핵연료에서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재처리할 가능성이 있는 ‘징후’를 포착했다고 밝혔다. 세계 곳곳의 원자력 활동상을 일거수일투족으로 지켜보고 있는 ‘감시견’ 수장이 주장했으니 이보다 확실한 징후는 없다. 그로시의 발언을 풍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맞다.

첫째, 김정은에게 ‘하노이 회담 참사’는 지도자의 힘과 명예에 심각한 타격을 준 일종의 ‘역사적 트라우마’였기에 미국에 대한 ‘비관적 세계관’의 일부분으로 각인되어 있을 게 분명하다. 고로 섣불리 협상에 임하기보다는 내부 단속을 통한 체제 강화로 선회한 것이다. 이는 비핵화 협상이 장기전에 돌입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사이에 북한은 계속해서 핵농축과 재처리를 통해 핵 능력을 강화할 것이다.

둘째, 핵농축은 특성상 지하시설에서 소규모로 비밀리에 작업하는 것이 가능하나 재처리는 큰 규모의 시설이 필요하기에 관련 건물들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은 재처리 활동을 보란 듯이 내보이면서 되레 미국에 압박카드로 활용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셋째, 북한은 재처리 카드에 대한 바이든 행정부의 대응을 향후 대미관계의 풍향계로 삼으려 할 것이다. 이를테면, 바이든 행정부가 재처리 징후에서 활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에 제재압박과 협상재개 중 어느 것을 취하느냐에 따라 김정은이 바이든 행정부에 대해 평가를 내릴 것이다.

김정은이 자신의 ‘관념적 필터’를 통해 걸러낸 미국의 이미지를 젊은 독재자의 비이성적 인식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자신의 인식 틀 내에서는 이성적인 셈이다. 나아가 미국이 자신을 기만하려 한다는 위험성을 감안해 전략적 판단을 내리는 김정은의 인지적 구조가 하노이 참사 이후 더욱 예민하고 강해진 탓이다. 그렇다면 재처리 시설 가동 징후를 교묘하게 ‘발신’하는 북한의 ‘겉마음’과 ‘속마음’을 분리·채취한 후 이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지가 바이든 외교팀이 당면한 고민거리다.

한 국가(미국)가 타국(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타국(북한)에 그대로 인식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전제는 현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정책적으로 위험하다. 지난 4년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남북관계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문재인 정부가 대화와 대결 모두 준비되어 있다는 김정은의 영리한 발언을 어떻게 평가하고, 이를 연례적 대북 협상무기인 한·미 연합 군사훈련 실시와 어떤 식으로 연계할지, 문 대통령의 마지막 ‘한여름밤의 꿈’의 결말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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