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 로얄’과 공정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36세 ‘청년’이 제일 야당의 대표가 되었다. 평소 공정한 기회를 강조해왔던 터, 대표수락 연설문부터 남다르다. 토론배틀을 통해 대변인단을 공개 채용하겠다. ‘5급’ 공무원 공개 채용이 공정한 시험을 통해 훌륭한 인재를 뽑는 것처럼, 토론배틀을 통해 뛰어난 대변인단을 선발하겠다. 공정한 경쟁의 기준은 ‘불확실성’이다. “그 승자는 누구일지 저도 모릅니다.” 피선거권도 없는 대학생이나 경력단절을 겪은 여성일 수도 있다. 누가 최후 승자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무지의 베일’이야말로 모든 이들을 배틀 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될 것이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청년의 장담은 헛말이 아니었다. ‘1분 논평’ 형식의 동영상 파일을 포함한 신청서를 받았다. 4명 뽑는 데 무려 564명이나 토론배틀에 지원했다. 그동안 현실 정치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20대가 235명, 30대가 178명. 둘을 합치면 73%가 넘는다. 10대도 36명, 전체의 6.4%에 이른다. 10대부터 30대까지 합치면 자그마치 80%에 다다른다. 1차 논평 영상심사로 150명, 이후 압박 면접을 통해 16명을 추렸는데, 기성세대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나가떨어졌다. 16강에서는 4명씩 조를 이루어 ‘65세 이상 무료 지하철 이용’ ‘제5차 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과 같은 공정 관련 주제를 놓고 ‘찬반’ 토론배틀을 벌였다. 배틀 결과 8명이 살아남았는데, 와일드카드로 되살아난 50대 1명만 빼고 죄다 청년이다. 8강전에는 1 대 1 데스매치가 추가되었는데, ‘25세 박성민 1급 비서관 임명’이나 ‘BTS 병역 특례’와 같이 공정 ‘감정’을 자극하는 주제다. 4명 생존, 50대 ‘경단녀’ 빼고 셋 다 청년이다.

정치권에, 그것도 보수정당에 왜 갑자기 청년이 몰려드는가? 다카미 고슌이 1999년 출판한 소설 <배틀 로얄>. 실업률 15%에 실업자 1000만명, 등교거부생 80만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대동아 공화국.’ 중학교 학급 중 한 반을 무작위로 골라 섬에 가두고 살인 게임을 강제한다. 3일 동안 같은 반 친구를 모두 죽이고 혼자 살아남는 게 게임의 유일한 규칙. 사전 정보 없이 무지에 휩싸인 채 같은 곳에 끌려와, 어떤 무기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배낭을 무작위 추첨으로 배당받아 섬 곳곳으로 흩어져 공정한 살인 게임을 벌인다.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3일 안에 1명만 살아남는 게 최선이다. 그때까지 우승자가 나오지 않으면 목에 부착된 목걸이 폭탄이 터져 모두 죽기 때문이다. 최종 승자의 ‘불확실성’과 최후의 1인이 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파국의 ‘불가피성’은 공정한 살인 게임의 ‘극적’ 긴장을 높인다.

배틀 로얄 세대는 살인 게임과 같은 무한 경쟁을 거듭 치르면서 승자독식이 당연하다는 극단적인 엘리트 세계관을 몸에 새겨왔다. 글로벌 시대에 ‘하버드’ 정도는 나와야 배틀 로얄에서 벗어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알바 뛰며 가까스로 ‘스카이’를 졸업해도 취업조차 어려운 게 현실. 학력 자본이 경제 자본으로 전환되지 않으니 분노가 치민다. 이런 판에 여성과 지방민에게 할당제를 실시해서 밥그릇을 빼앗아가니 민주주의의 ‘민’자만 들어도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 이제 ‘영끌대출’ 받아 부동산이나 비트코인으로 경제 자본을 축적하려는데, 파렴치한 투기꾼 취급하며 모두 막아버리니 악이 바친다.

<배틀 로얄>에서 학생이 묻는다. “왜 우리죠?” 선생이 답한다. “너흰 어른을 깔보잖아. 인생은 게임이야. 다들 필사적으로 싸워서 가치 있는 어른이 되자는 거다.” 청년 대표가 앞으로 국회의원을 포함한 모든 선거 공천에 자격시험을 도입하겠다고 한다. 기성세대가 볼멘소리로 왜 우리에게 그러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청년 대표는 껄껄 웃으며 답할 거다. “너흰 청년을 깔보잖아. 인생은 게임이야. 다들 가치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던 청년기를 되새겨보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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