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들이 찾는 맥주

조미덥 산업부 차장

“기자님, 요즘 시각장애인들은 맥주 마실 때 ‘테라’만 먹습니다.”

지난달 취재차 방문한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사무실에서 시각장애인 이병돈 대표가 말했다. 기자가 의아해하자 옆에 있던 직원이 냉장고에서 테라 한 캔을 꺼내왔다. 이 대표가 캔의 음용구 근처를 손으로 더듬더니 뭔가를 찾았는지 환하게 웃었다.

조미덥 산업부 차장

조미덥 산업부 차장

“다른 맥주는 ‘맥주’라고만 돼 있는데, 테라만 이렇게 ‘테라’라고 점자가 쓰여 있어요. 테라 캔은 슈퍼에서 시각장애인 혼자서도 고를 수가 있습니다. 이러니 고마워서라도 테라만 마시죠.” 그에겐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제품을 고를 수 있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고 기쁜 일이었다.

시각장애인 한솔은 지난 1월 유튜브 방송에서 시중의 음료들을 모아 점자로 구분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병에 빗살무늬가 있는 미에로화이바, 삼각형 팩에 담긴 삼각커피우유 등 외형에서 큰 차이가 있는 건 잘 골라냈지만 다른 음료는 구분하지 못했다. 캔은 점자를 통해 ‘음료’ ‘탄산’ ‘맥주’로만 구분됐다. 그마저 일부는 탄산음료인데 ‘음료’로 표시돼 있고, 수입 맥주·음료 일부는 점자가 없었다. 한솔이 점자로 알아낸 음료는 테라와 비락식혜뿐이었다. 비락식혜는 제품명이 없어도 하트가 점자로 표시돼 다른 음료와 구별할 수 있었다.

물론 음료, 탄산, 맥주를 구분한 것도 없는 것보단 낫다고 할 수 있다. 기업들이 그 점자를 새기는 데도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이라고 해서 탄산이면 콜라든 사이다든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각이 아닌 후각·미각 등의 감각은 비장애인들보다 더 예민할 수 있다. 이들에게 언제까지 운에 기대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음료를 고르게 할 것인가.

하이트진로는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2019년 테라를 출시하면서 제품명을 점자로 넣었다. 비용 부담은 새로운 점자가 들어간 동판 제작비만 추가돼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한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다른 제품도 넣고 싶었지만 공간상 점자를 4개까지밖에 넣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테라(ㅌㅔㄹㅏ)는 되는데, 맥스(ㅁㅐㄱㅅㅡ)는 5개, 하이트(ㅎㅏㅇㅣㅌㅡ)는 6개라서 안 됐다는 것이다. 팔도는 유일한 캔음료인 비락식혜가 나온 1998년부터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하트 모양을 넣어 제작했다고 한다.

시각장애인들은 형식상 완벽하지 않더라도 제품을 구분할 수 있기를 원한다. 시각장애인들이 특별할 것 없는 비락식혜의 하트에 환호하는 이유다. 이병돈 대표는 “점자 넣을 자리가 부족하면 ‘맥주’를 빼고 제품명만 넣으면 된다”고 말한다. 제품 앞글자만 쓰거나, 한국을 KR이라고 쓰는 국가코드처럼 약자를 넣을 수 있다.

요즘 기업들이 너도나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한다고 나선다. 시각장애인들이 소비자로서 자사 제품을 정확히 인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단기적으로 비용이 들더라도 사회적 책임에 부합하는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도 이 문제를 기업의 선의에만 맡겨두면 안 된다. 점자 표기의 표준을 정해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점자 표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정부 재정으로 일부 보전해주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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