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적 사고

백승찬 문화부 차장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말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2003년 개혁국민정당 집행위원 회의에서 했다고 전해진다. 당원들이 당내 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요구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훗날 그는 진의와 표현이 왜곡됐다고 해명했지만, 발화자의 본심과 관계없이 이 표현은 젠더 문제에 대한 ‘진보’ 일각의 태도를 함축하는 말로 남아버렸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의 잇단 성폭력 사건과 이에 대한 여권의 2차 가해를 보면, 미투 시대 이후에도 ‘해일과 조개론’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권을 획득하고 의회에서 다수당이 되는 일에 비하면, 일상의 성폭력 문제는 해변에서 조개 줍는 일처럼 한가하고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백승찬 문화부 차장

영장류학자 제인 구달은 히스로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서 겪은 일을 소개한 적이 있다. 구달을 알아본 택시 기사는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사람보다 동물에 신경 쓰시는 분이죠? 내 여동생도 같은 일을 합니다”라고 말했다. 기사는 이어 자신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토로하고, 구달이 동물권보다 인권에 신경 쓰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기사의 말을 묵묵히 들은 구달은 야생동물과의 교감 경험이 어떠한지, 자연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떤 변화를 느끼는지, 이 모든 것들이 인류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야기했다. 택시는 공항에 도착했고 대화는 끝났다. 나중에 집에 도착한 구달은 기사의 여동생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오빠가 자신이 일하는 동물권 단체에 자원봉사를 나오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고전적인 사회 균열 이론은 이념, 젠더, 계급, 세대, 엘리트·민중 등의 균열이 사회적 대립을 만든다고 본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인종, 종교 등 새로운 균열 요소가 추가되기도 한다. 정치적 진보의 입장에 섰지만 문화적으로 보수인 사람, 인종적 소수자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류층인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은 복잡하고 다양해 하나의 범주에 포괄되지 않는다. 감수성의 발화 지점도 각기 다르다. 문제는 자신이 일시적으로 속한 범주의 가치를 절대화하고, 다른 범주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길 때 일어난다.

20대 대선이 9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잠재적 후보들이 주목을 끌고 있다. 이들의 과거 언행은 물론 이런저런 가족사까지 검증의 대상이 되곤 한다. 기자회견하며 어떤 몸짓을 했는지, 방문한 장소에 뭐라고 적었는지도 뉴스가 된다. 각 정당의 후보가 확정되고 본격적인 선거전이 펼쳐지면 이 같은 양상은 심화될 것이다.

물론 제도로서의 정치는 중요하다. 정치는 사회와 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왕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회가 태평성대라는 건 요순시대였기에 가능한 인식이다.

그러나 사회의 모든 이목이 정치적 갈등의 전선에만 쏠려 있는 것도 문제다. 누군가는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지보다는 골목길 길고양이의 생태가 신경 쓰일 수도 있다.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는 소식보다 훈민정음 창제 시기 한글 금속활자의 발견 소식에 더욱 흥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타인의 관심을 사소하다고 단정하지 말라. “지금 그게 중요해?”라고 말하지 말라.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고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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