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일 수 있기를

장은교 소통·젠더데스크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1915~1987)는 1970년대 미국에서 “가장 남성적인 SF를 쓰는 남자”로 평가받았다. 힘 있고 강렬한 전개와 다소 건조하면서도 점잖은 말투가 쓰였다는 점, 군대와 중앙정보국(CIA)의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점, 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이 잘 드러나 있다는 점이 그가 틀림없이 남성 작가라는 이유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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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트리는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작가들과 편지로만 교류했다. 그의 많은 소설이 성불평등을 신랄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어떤 독자들은 여성 작가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소위 전문가들로부터 ‘웃긴 소리’ 취급을 받았다. 동시대의 작가 로버트 실버버그는 그를 “연방 관료를 지낸 50대 남성”으로 추측하며 “제인 오스틴의 글을 남자가 썼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팁트리의 소설은 남자의 소설”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

진실은 1976년 우연히 밝혀졌다. 팁트리가 편지에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했는데 그중 몇 명이 지역신문에서 부고를 찾아냈다. 그즈음 해당되는 사람은 한 명이었고 유족은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이라는 61세 기혼여성뿐이었다.

어릴 때 부모와 함께 인도와 아프리카 등을 여행한 셸던은 다양한 경력을 지녔다. 공군 조종사와 CIA 정보원으로 일했고, 화가이자 예술비평가였다. SF소설은 심리학 박사과정 중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셸던은 여러 분야에서 ‘첫 여성’이라 받았던 불편한 관심을 기억하며, 작가로서는 성별로 주목받고 싶지 않아 필명을 썼다. 그가 ‘라쿠나 셸던’이라는 필명으로도 글을 썼다는 사실 역시 밝혀졌다. 당시 이 일은 ‘팁트리 쇼크’라고 불릴 만큼 미국 소설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의 소설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셸던은 이후에도 작품을 발표했지만, 성별을 둘러싼 소란으로 큰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 그는 작가로서나 아내로서 자신을 사랑하고 지지했던 남편이 알츠하이머에 걸리자 투병생활을 도왔고 1987년 남편의 죽음이 가까워지자 남편을 총으로 쏜 뒤 자신도 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1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기념상’이 제정돼 젠더문학의 지평을 넓힌 사람들에게 시상됐다. 어슐러 르 귄, 마거릿 애트우드 등 현대 SF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이 상을 받았다.

지난 주말 그의 소설들을 읽다가 팁트리, 아니 셸던이 2021년 대한민국에서 환생한 모습을 상상해 봤다. 혹시 그가 또 글을 쓸 거라면 다정한 마음으로 얘기해주고 싶다. 당신의 글에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딱지가 붙게 되면 누군가는 “너도 쇼트커트냐?”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냥 무시하면 된다고. 한국엔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속담이 있다고. 그런데 종종 어떤 똥은 더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고.

그보다 먼저 이 얘길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써냈던 ‘현실’은 여전히 이곳에서도 현실이며, 당신이 그렸던 ‘어떤 미래’는 아직도 미래로 남겨져 있다고. 그리고 이름을 세 개나 가져야 했던 당신이 누구보다 바랐을 ‘내가 나일 수 있기를…’이라는 소원은 여전히 어떤 이들에겐 절실한 기도로 남아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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