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어떤 죽은 이의 말

이해인 수녀
석양. 강윤중 기자

석양. 강윤중 기자

안녕? 나는 지금 무덤 속에서
그대를 기억합니다
이리도 긴 잠을 자니 편하긴 하지만
땅속의 차가운 어둠이 종종 외롭네요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많고
보고 싶은 이들도 많은데
이리 빨리 떠나오게 될 줄 몰랐지요
나의 떠남을 슬퍼하는 이들의 통곡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해요
서둘러 오느라고
인사도 제대로 못해 미안합니다
꼭 한 번만 살 수 있는 세상
내가 다시 돌아갈 순 없지만
돌아간다면 더 멋지게 살 거라고
믿는 것도 나의 착각일 겁니다
내 하고 싶은 많은 말들
다 못하고 떠나왔으나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어요

삶의 정원을 순간마다 충실히 가꾸라는 것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새겨듣고
웬만한 일은 다 용서할 수 있는
넓은 사랑을 키워가라는 것
활활 타오르는 뜨거움은 아니라도 좋아요
그저 물과 같이 담백하고 은근한 우정을
세상에 사는 동안 잘 가꾸려 애쓰다 보면
어느 새 큰 사랑이 된다는 것
오늘도 잊지 마세요. 그럼 다음에 또…

- 시집 <필때도 질때도 동백꽃처럼> 중에서

요즘 부쩍 가까운 지인들의 부음을 듣는 일이 많아 잠 안 오는 시간들이 이어집니다. 오랜 시간 따뜻한 우정을 나누던 어느 자매가 갑자기 암진단을 받고 수술 후 ‘수녀님처럼 명랑투병할게요’라고 안부를 전해온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들으니 어찌나 놀랍고 슬프던지요.

이해인 수녀

이해인 수녀

바로 같은 날 지난 칼럼에서도 언급한 일이 있는 우리수녀회 김지상 레티치아수녀님이 선종하셔서 어제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시기적으로 많은 사람을 초대할 수도 없는 여건이긴 했으나 어쩌면 직계가족이나 친지가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이례적인 예식이었고 고별식에서도 특별한 성가 대신 서원식에 부르는 봉헌노래만 합창하는 것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 입원을 앞두고 제게 우리가 공동으로 외우는 기도문의 어떤 구절이 번역이라 그런지 어색하게 느껴지니 꼭 수정해 주길 바란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떠난 우리 수녀님, 스스로 가난과 침묵과 겸손의 삶을 표양으로 보여주신 수녀님답게 너무도 소박하고 간소하게 치러지는 장례식을 보면서 새삼 더 존경스럽고 부럽기도 하였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그분의 유품을 복도에 전시하는데 라틴어로 성경을 정교하게 필사한 큰 노트 5권과 당신의 맘에 드는 글들을 스크랩하여 보관한 몇 가지가 전부였습니다.

종이상자 뚜껑을 액자로 삼아 거기에 붙여 둔 일본작가 소노 아야코의 말을 저는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어 여기에 소개합니다. 돌아가신 수녀님과도 연배가 같은 작가의 다음 말들을 그대로 실천하다 떠나신 우리 수녀님을 추모하며 부족한 후배수녀로서 그분의 영성을 조금이나마 닮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보다 그것들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한 부자가 된다”는 구절이 특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1. 차츰 개인의 물건을 줄여나간다.

2. 노년의 고통을 인간완성을 위한 선물로 받아들인다.

3. 혼자서 즐기는 습관을 들인다.

4. (내면의 고요를 위하여)외출을 삼간다

5. 타인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위안을 끊는다.

6. 자신의 죽음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도록 노력한다.

- 소노 아야코의 <100년의 인생 또 다른 날들의 시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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