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희와 고 최숙현, 그리고 기억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정윤수의 오프사이드] 심석희와 고 최숙현, 그리고 기억

누구나 기나긴 삶의 행로에서 불가피한 찰과상을 입게 되고 쉽게 아물지 않을 그 상흔에 의하여 가급적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 생기곤 한다. 슬픈 장례식은 물론이요, 경사스러운 잔칫날에서조차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군가의 이름은 괄호 안에 갇히곤 한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감히 불러보건대 심석희 선수와 고 최숙현 선수. 나는 지금 두 선수의 이름을 아주 조심스럽게 부르는 중이다. 서푼어치 주장의 근거로 삼기 위해 극심한 고통을 겪은 이름을 함부로 ‘남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통증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감히 두 선수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은, 그들의 고통이 지속되었던 시기와 2020 도쿄 올림픽에 참가한 대다수 젊은 선수들의 성장이나 훈련 기간과 겹치고, 그렇다면 ‘MZ세대의 활기찬 열정’으로 기록될 이번 올림픽의 환호성 사이로 혹시나 두 선수의 이름이 망각되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동계올림픽의 상징이었던 심석희 선수의 이름은 2019년 1월 이후 한동안 직접 호명되지 못하였다. 특정 사건을 가해자의 이름으로 명명해야 한다는 사회윤리에 따라 ‘빙상코치 가해사건’이라는 괄호 안에 잠시 머물러야 했는데, 선수 본인이 그 괄호를 벗겨냈다. 당당히 재판에 응하였고(가해 코치에게 10년6개월의 중형 선고) 선수 인권 보호와 스포츠문화 개선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였으며, 무엇보다 지난 5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하며 6개월 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가장 높은 자리에 새길 준비를 다 마쳤다.

심석희 선수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스포츠계는 연쇄적인 폭행 및 성폭행 사건의 구조적 해결이라는 과제에 직면했고 그것이 지지부진하던 중에 최숙현 선수가 최악의 상황에서 마지막 선택을 했다. 가해자들은 지난 8월, 항소심에서 징역 7년(감독)과 징역 4년(주장)에 처해졌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일부 지자체까지 스포츠윤리센터를 설립하는가 하면 스포츠클럽법, 체육인복지법, 스포츠기본법 등이 공포되었다.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지도자와 선수들이 이 사건들과 전개 과정을 몰랐을 리 없다. 더욱이 올 초에는 ‘스포츠계 학폭’ 사건들이 터졌기 때문에 대다수 젊은 선수들은 그 상황들이 요구하는 외적 압력이나 심리적인 긴장까지 견뎌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아마도 어떤 이름들은 거론해서는 안 될 이름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수많은 팬들도 지난 몇 해 동안 스포츠계의 더 나은 미래를 응원하였다. 그것은 스포츠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넘어 스포츠를 통한 한국 사회의 변화로까지 확산되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이른바 ‘청년 담론’의 키워드는 ‘잉여’ ‘루저’ ‘헬조선’이었다. 모두가 스펙 경쟁에 내몰려 에너지를 청년기에 다 쏟아부었는데, 결과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온 가족까지 열패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후에야 ‘함께 살자’는 위로와 권유가 확산되어 이제는 정치·사회 전 분야에 걸쳐 공존의 윤리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 규범을 제도화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스포츠계의 연이은 폭력 사건과 그것의 고통스러운 해결 과정이었고, 이 상황에서 2020 도쿄 올림픽이 열렸다. 팬들은 선수들 모두가 마땅히 참가할 만한 능력과 그에 합당한 노력을 다하였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목표를 성취한 선수를 격려할 뿐만 아니라 아쉽게 그친 선수에게도 위로를 보냈다. 스포츠가 당대의 사회적 감정을 즉각적일 뿐만 아니라 격렬하게 투영하는 장이라는 게 다시 입증되었다.

많은 언론들은 젊은 선수들의 활기찬 자기 표현이 ‘MZ세대의 독특한 개성’이라고 풀이한다. 그런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젊은 열정’은 동어반복이자 사회적 현상의 표면만 진부하게 스케치한 수식이다. 젊은 세대는 저절로 활기찬 게 아니다. 고통을 딛고 몸부림친 것이다. 그들의 현실이 ‘독특한 개성’을 맘껏 표출할 수 있는 상황도 아직은 아니다.

젊은 선수들의 활기찬 표현은 가혹한 생존 조건을 좀 더 윤리적이고 공정하게 변화시키려는 다양한 사회적 열망과 동반한 것이다. 그들이 선발되고 훈련하는 몇 해 동안 동시에 전개된 스포츠계의 고통과 그 변화의 몸부림에 맞물려 피어난 진흙 속의 연꽃이다. 그런 점에서 심석희 선수와 고 최숙현 선수는 스포츠계를 넘어 우리 사회 전체의 미래적 가치 실현에 온당하고 절실하게 기여한 이름으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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