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서사? 생명보다 귀중한 얘기는 없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영화 <모가디슈>의 한 장면.

영화 <모가디슈>의 한 장면.

“나는 내러티브를 좋아하지 않는다.” 2017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다비드 그로스만이 대담 도중 뜻밖의 말을 했다. 소설가가 내러티브, 서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는 국가 이데올로기,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관습법과 질서가 완고한 내러티브로 이뤄졌다는 취지의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신념의 형태로 권력이 되어 버린, 소위 껍질이 더 중요해진 이데올로기를 싫어하는 것이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그도 그럴 것이, 다비드 그로스만은 히브리어로 작업하는 이스라엘 작가이다. 이스라엘 작가라고 말하는 순간 수많은 기성서사들이 따라붙는다.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 노마드, 디아스포라, 팔레스타인, 지하드, 시오니즘 등등. 어느 나라 출신의 어떤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연상되는 서사, 그 서사는 축복일 수도 있지만 일종의 굴레이기도 하다.

빅 히스토리에 대한 유례없던 관심을 불러일으킨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인간을 ‘이야기하는 존재’로 규정한 바 있다. 그는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를 구분함으로써 인류가 결핍이나 고통을 극복해 나간다고 말했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고통스럽고, 형편없는 일들이 인생을 더 입체적이며 아름답게 만든다며 자아를 설득한다. 그렇게 고통은 서사를 통해 가치 있는 것으로 기록된다. 이야기는 우리를 견디게 해주는 면역체계이지만 합리화 기제이기도 한 셈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에게도 이미 주어진 기성 서사가 많다. 일제강점의 역사가 그렇고 한국전쟁이 그렇고 복잡다단했던 민주화 과정이 그렇다. 이런 서사들은 너무 강렬해서 개인의 소박한 이야기를 압도하기 십상이다. 오랜 세월 한국 사회를 붙잡아온 가부장제는 우리 사회의 얼마나 강력한 집단 서사였던가? 소위 기득권 세력들도 자기방어적 변명을 그럴듯한 서사로 종종 제공하곤 한다. 경제발전을 위해 노고를 바친 대기업 총수가 반드시 용서받는 것도 그런 오래 묵은 서사 중 하나이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모가디슈>는 그런 점에서 이데올로기적 서사라는 게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그러나 또 얼마나 공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때는 1990년,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남한은 서둘러 유엔 가입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북한은 남, 북 분리 가입은 분단을 공고화할 것이라며 주저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의 서사와 목적이 다른 두 나라 외교관이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만난다. 영화의 초반 북쪽의 림용수 대사와 남쪽의 한신성 대사의 만남은 오래된 분단 서사에서 한 치도 어긋나 있지 않다.

이 고답적 서사가 비틀리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모가디슈가 분쟁에 휘말려 말 그대로 전쟁터가 되고부터이다. 림용수 대사의 말처럼, 그 순간부터 중심 서사는 “생존”이 된다. 생존이라는 절대 서사 앞에 남북을 나누던 이데올로기적 서사 도구들은 후순위로 밀린다. 남이든 북이든 간에, 일단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철자야 같지만 불통하던 언어는 생존이라는 목적 서사 앞에서 소통 수단으로 바뀐다.

따지고 보면, 살아남는 게 가장 윗길이니 수령님이니 국가보안법이니 하는 하위 서사는 하등 중요할 게 없다. 죽고 나면 그런 이데올로기는 무슨 소용인가? 태어나는 게 서사의 시작이라면 모든 서사의 끝은 결국 죽음이다. 죽은 자에게 서사는 있을 수가 없다. <모가디슈>가 감동을 주는 면도 여기에 있다. 사실상 이데올로기, 신념이라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것인가, 그저 하나의 완결된 서사, 권력이 된 내러티브에 불과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최근 뉴스 창을 가득 메운 아프가니스탄의 혼란도 마찬가지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라고 불리는 탈레반은 소위 이념을 수출하는 집단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슬람 교리를 엄격하게 해석한 샤리아법 역시 누군가 절대화한 하나의 내러티브에 불과하다.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이 된 종파적 대결 역시도 사실상 내러티브 차이에 불과한 것 아닐까?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적 자아를 견디게 하고, 살게 했다. 그러나 서사나 내러티브가 경험적 실체를 위협한다면, 그건 이미 너무 잘못된 것 아닐까? 생명보다 귀중한 이야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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