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는 용서보다 복수를 원한다

영화 <발신제한> 한 장면.

영화 <발신제한> 한 장면.

“테러: 살인, 납치, 유괴, 저격, 약탈 등 다양한 방법의 폭력을 행사하여 사회적 공포 상태를 일으키는 행위”. 사전을 찾아보면, 테러는 폭력적 방법으로 사회에 공포를 일으키는 행위를 일컫는다. 목적에 따라 두 개로 나뉘기도 하는데, 사상적·정치적 목적을 위한 테러와 뚜렷한 목적 없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로 구분된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테러는 영화가 사랑하는 소재 중 하나이다. 테러 영화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을 <다이 하드>의 테러범들은 정치적 테러인 척했지만 사실 돈을 노린 집단이었다. 폭탄, 총기 등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보니, 테러 영화는 우리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장르이기도 했다. 범죄 영화가 주로 칼을 쓰는 조직폭력배 영화로 집중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의 상업영화 시장에 인상적으로 등장한 테러 영화가 바로 <더 테러 라이브>이다. 생방송 현장과 한강 다리 폭파, 방송용 인이어에 내장된 폭발물 같은 요소들을 활용해 한국에서는 사실상 거의 볼 수 없던 테러를 영화적 오락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 영화에서 테러범은 두 가지 범주 중 늘 사상적·정치적 목적을 가진 쪽에 속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윤리적 올바름을 기반으로 한 개인적 복수에 가깝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죽은 인부들에 대한 사과를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올여름 개봉한 <발신제한> 역시 이 맥락을 따라간다. <발신제한>은 은행의 한 센터장에게 걸려온 발신제한 전화로부터 시작된다. 의문의 발신자는 수신자가 타고 있는 차량 운전석과 보조석 아래에 유압식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고 위협한다. 엉덩이를 떼면, 그러니까 차에서 내리면 바로 폭발할 것이라고 겁준다. 원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테러범은 현금으로 9억6000만원을 마련하고, 케이먼 제도에 마련한 계좌로 17억2600만원을 송금하라고 요구한다.

평상시답지 않게 딸, 아들 남매까지 태우고 출근길에 나섰던 수신자가 느끼는 위협과 공포, 위기를 돌파해 가는 순간순간이 바로 영화의 주된 스릴러이자 서스펜스이다. 그가 얼마나 공포스러워하는지 클로즈업된 화면으로 제시하고, 그가 테러범의 명령에 따라 도심을 뚫고 질주하며 도피하는 과정을 차량 액션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왜, 발신자가 테러범이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은 채, 공포와 액션으로 관객을 달군다. 여름용 상업영화로서, <발신제한>이 노리는 지점이 이 부분에 있기도 하다.

<발신제한>의 테러범에게도 사연이 있다. 사연을 듣고 보면 그는 범죄자보다 억울한 피해자에 가깝다. 은행 센터장이 범행 대상이라는 점에서 금융 피해자임을 눈치챌 수 있다. 피해를 복구할 힘이 없는 사회적 약자가 영화에서만큼은 실질적 가해자에게 공포와 충격을 주며 주도권을 갖는다. 영화 속 테러범의 말처럼, 용서는 힘 있는 자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힘없는 자들에게 용서는 자기 위안의 정신 승리일 뿐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돌고 있는 공정론은 위험한 각자도생의 논리 위에 서 있다. 그런 논리를 따르자면 힘없고, 정보에 취약하고, 법적으로 대응할 경제력이나 여력이 부족한 계층은 도태되어 마땅하다. 모든 상황에 대해 개인이 알아서 책임져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공정으로 위장한 정글의 논리다. 시장이 금도 없는 자유를 누리게 될 때, 사회는 자칫하면 정글이 되고 만다.

2011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저축은행 사태에서도 더 큰 피해는 주로 평범한 금융 소비자들에게 돌아갔다. 저축은행 영업정지 직전 VIP 고객들에게는 미리 연락해 출금을 도와주었다는 뉴스는 바로 우리 사회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에겐 회피의 기회가 주어지고, 평범한 사람들은 벼락을 그대로 맞아야 한다. 세상은 언제나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에겐 관대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원칙론이 강조된다. 피해 복구를 위한 법률적 과정도 마찬가지다. 소송에 돌입하면 피해액에 덧붙여 천문학적 소송비용이 더 쌓인다.

2021년 6월30일 현재 ‘불완전판매’라는 검색어를 넣어 보면, 피해 기사가 속출한다. 때마다 ‘소비자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하나 마나 한 교과서적 우려가 반복된다. 하지만 현실의 피해자는 영화 속 테러범처럼 그렇게 정교한 기술로 폭탄테러를 할 수도, 복수를 할 수도 없다. 금융 피해자의 복수가 영화적 판타지로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씁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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