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 되는 소설, 소설이 되는 게임

인아영 문학평론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문학과 철학의 오랜 전유물이었던 이 근원적인 질문이 비디오 게임으로 구현된 사례가 있다. 에스토니아의 게임회사 ZA/UM이 개발하고 2019년 출시한 RPG ‘디스코 엘리시움(disco elysium)’이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공산주의 혁명이 끝나고 쇠락한 도시 레바숄의 어느 호스텔 방.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숙취에 시달리며 깨어나는 망나니 형사 해리가 된다. 해리는 주민들을 탐문하며 뒷마당 나무에 목매달린 남자의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런데 남자를 죽인 범인을 밝혀내야 하는 과제 말고도 해리에게 주어진 숨은 과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알아내는 것이다. 해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가? ‘선택과 결과’라는 법칙에 따라 게임을 수행하는 플레이어에게 이는 다음 질문으로 바뀐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플레이어는 지성, 감성, 육체, 운동이라는 범주로 구성된 24개의 개별적인 인격을 키우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구축할 수 있다. 여기까지야 드물지 않은 설정이다. 이 게임의 특별한 점은 여러 능력치의 정교한 배합으로 형성되는 플레이어의 다양한 인격이 줄거리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는 것이다. ‘논리’가 부족하면 사건의 중요한 단서를 눈앞에서 놓치게 되고, ‘공감’이 뛰어나야 용의자에게서 치명적인 진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식이다. 이에 따라 캐릭터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무수하게 갈라지고, 플레이어마다 전혀 다른 스토리를 경험하지만, 게임의 결말은 체계적으로 잘 짜인 하나의 줄거리로 수렴된다. 이를 감당하기 위한 대본의 양이 방대할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4000여쪽에 달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권 분량과 맞먹는다는 이 대본은 누가 썼을까?

놀랍지 않게도, 소설가다. 1984년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난 ‘디스코 엘리시움’의 개발자 로버트 쿠르비츠는 29세에 5년에 걸쳐 집필한 14권짜리 소설 <신성하고 끔찍한 공기>를 발표했지만 처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그 후 3년 동안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쿠르비츠가 동료 소설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문학 세계를 비디오 게임으로 만든 것이 ‘디스코 엘리시움’이다. 소설가가 창작한 텍스트가 비디오 게임이 되고, 비디오 게임이 독자가 참여하는 긴 소설처럼 읽히는 셈이다.

이야기가 게임의 본질이 될 수 있을까? 가장 널리 알려진 게임 연구의 방법론은 놀이학(ludology)과 서사학(narratology)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다. 게임은 한편으로 규칙 체계로 이루어진 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플레이어의 참여로 전개되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의 능동적인 선택과 상호작용에 따라 이야기의 경로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소설과 같은 전통적 서사 장르의 혁신이 되리란 기대도 가능하다. 언젠가는 게임이 소설을 대체하게 될까?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게임이 소설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 날이 올까? 이제 막 우리 앞에 열리고 있는 질문이다.


Today`s HOT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이·팔 맞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인도 스리 파르타샤 전차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시위대 향해 페퍼 스프레이 뿌리는 경관들 토네이도로 쑥대밭된 오클라호마 마을 페루 버스 계곡 아래로 추락 불타는 해리포터 성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