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 목사·시인
[임의진의 시골편지] 인기척

첫눈 소식이 반가워라. “네가 형제를 만났는데, 둘 다 벌써 종이 무더기 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던 터라, 이제 와서는 뭔가 새롭고 특별한 것을 말하고자 해도 할 말이 없다.” 남태평양 사모아 섬마을 추장 투비아비가 이방인 빠빠라기에게 남긴 말. 이 글도 신문에 실린다만, 잠시 종이 무더기를 덮고 창문 밖의 만추와 황홀한 첫눈을 내다볼 일이다.

산골엔 온종일 기다려도 인기척도 없고, 대신 새들이나 들고양이,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유기견의 일가만이 보일 뿐. 추위가 찾아오니 대비하느라 좀 바빴으며 출타도 빈번. 개신교 교회협과 천주교, 정교회가 함께하는 문화제의 ‘예술감독’을 작년부터 맡고 있는데, 일로 서울행이 잦았다. 그림을 걸고 떼고 하다가 정작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산골 풍경과 멀어지고 말았다. 하루는 고속열차에서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탐독. “기차는 눈으로 하얗게 덮인 풍경을 뚫고 미끄러져가고 있었다. 그 풍경은 얼마나 부드럽고 다정한가. 나는 그 잠든 집들을 보면서 그때까지 한번도 느껴본 일이 없었던 도취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머잖아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보게 되리라. 불 켜진 마을들 사이로 달리는 호남선 열차. 마치 우쿨렐레의 현과 같은 철로, 또 감이나 귤, 청포도 같은 집들이 알알이 박힌 마을 풍경은 생의 위안이 되곤 해. 거기 어딘가 인기척이 있을 테고, 사람은 얼마나 반가운 존재인가.

전시 준비하며 화가 임옥상 샘에게 급히 전화. “아니 그림 안 보내시고 어디 계십니까잉?” “아따메. 전라도 땅끝마을에 와부렀소. 바다가 보고 싶어 급히 왔지라. 사람이 많지 않아 참 좋소.” 사투리 흉내를 내시고. 그 바다 두고 서울에서 나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치이고 그랬다. “내 오두막집은 야자나무보다 낮다. 야자나무는 폭풍우에 구부러져. 폭풍우는 큰소리로 호통을 친다.” 투비아비는 자연의 위대함을 경배하고, 귀하고 드문 부족 사람을 공경한다. 출산율이 낮다고 걱정하는 이들을 보곤 하는데, 댁들부터 먼저 애를 낳거나 입양하라 호통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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