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희 변호사
[조광희의 아이러니] 가을 느낌

끝나지 않는 코로나와 감동 없는 대통령 선거로 지루한 세상이지만, 나들이를 나가면 아름다운 늦가을이 축복해 주는 나날이다. 지난 주말에는 새로 복원해서 공개한 경복궁 향원정을 구경했다. 궁궐의 나무는 높았고, 정자 너머의 하늘은 푸르렀다. 무수한 이파리들이 빨강에서 주황을 거쳐 노랑으로 이어지는 스펙트럼을 이룬 정경은 세상이 고단하고 인간의 일이 덧없다는 것을 잊게 했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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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날이면 10대 때부터 좋아하는 김광균 시인의 시 ‘추일서정(秋日抒情)’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많은 이가 애송하는 이 시의 제목을 요즘 어투로 옮기면 ‘가을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수십년간 무심히 이 첫 구절을 읊조렸는데, 몇 년 전 문득 도룬 시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진 적이 있다. 인터넷으로 확인하니 지동설을 주창한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난 곳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이 도시를 점령했는데, 수많은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체포되고 학살되었다고 한다. 유서 깊은 건축물이 많은 옛날 시가지는 이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으로서 일제강점기를 살아갔던 김광균 시인은 처지가 비슷한 폴란드에 가여운 마음이 일어 첫 구절을 적었을 것이다.

이런 가을에 가까운 공원에라도 나가지 않는 사람은 제 인생에 죄를 짓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약속장소에 일찍 도착하면 근처 공원을 산책하는 버릇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일부러 미리 가서 산책하고 약속장소로 가는 경우가 많다. 약속장소가 성수동이라면 서울숲에 들르고, 양재동이라면 시민의 숲에 들르는 식이다. 오늘 약속장소는 신사동이라 미리 도산공원에 들어갔다. 산책객들이 더러는 혼자 더러는 들뜬 강아지들과 가을을 누리고 있었다.

산책로를 걷다가 이따금 나무의 이름표를 살펴보려고 멈추어 선다. 그러다가 의외의 이름과 마주쳤다. 나무 하나가 포도나무처럼 헝클어진 가지마다 단풍에 물든 잎들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스산하게 서 있는 그 나무 앞에는 ‘라일락’이라는 이름표가 세워져 있었다. 청신한 사월의 향기로만 기억되는 라일락의 이런 모습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20대에 라일락 향기를 함께 맡으며 노닐던 친구들로 연상이 이어지자, 계절로 치면 가을로 들어선 50 중반의 인생이란 것이 마음에 사무친다. 나는 이름표가 없었다면 못 알아보았을 라일락 한 그루를 사진에 담는다.

다시 산책로를 걷는다. 이제 가을은 그저 눈앞의 풍경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하다. 인생의 봄과 여름을 생각하며 마저 걷는데, 여기저기 도산 안창호 선생이 생전에 남긴 말들이 눈에 들어온다. 돌에 새겨진 어느 문구는 도산공원에 올 때마다 반드시 읽게 된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읽을 때마다 이 시대의 고단한 청년들이 떠오르는 문구다. 잘 알려진 이런 문구도 있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유력한 대선 후보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한탄하는 우리의 뼈를 때리는 말씀이다.

나는 가을의 정취를 느끼러 왔다가 예기치 않은 상념들에 사로잡힌다. 시대를 어찌어찌 헤쳐 왔지만, 젊은이들에게 너무 많은 문제를 남겼다는 미안함을 피하지 못한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선 이들의 면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푸념하다가, 보잘것없는 나 자신을 돌아본다. 하지만 공원을 나와 식당에 갈 때까지 정작 내 마음에 계속 남은 것은 초라한 행색의 라일락이었다.

싱싱한 젊음도 아찔한 향기도 없이, 금방 넘어질 듯 서 있는 라일락은 내 모습 같았다. 그래도 저 나무는 나와 달리 새봄이 되면 다시 꽃을 피우고 사방에 향기를 퍼뜨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쩐 일인지 그것이 그리 서운하지는 않았다. 나무에게는 나무의 생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삶이 있다는 걸 배워버렸기 때문일까. 김광균 시인은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라고 적었는데, 나는 ‘걸음에 걸리는 낙엽을 예사롭게 떨쳐내며’ 걸었다. 이번 주말에는 한강 선유도공원 근처에서 만나는 약속을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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