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우리를 건져낼 수 있을까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We are sinking.” 지난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남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의 사이먼 코페 외무장관이 허벅지까지 차는 바닷속에서 연설하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물에 잠기고 있는 투발루의 절박한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감행한 수중 연설이었다. 하지만 ‘석탄발전의 단계적 감축’과 ‘화석연료 보조금의 단계적 폐지 노력’을 담은 글래스고 합의문은 코페 장관이 다급하게 요청한 “내일을 지키기 위한 오늘의 과감한 대안적 조치”에 비해 한가하기 짝이 없다. 합의문에 화석연료가 언급된 것 자체가 처음이라는 의미 부여도 안이하긴 마찬가지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이번에 재확인된 것은 세계의 부국을 위시한 국제사회가 기후위기를 불러온 경제성장의 틀을 바꿀 의지도 성장 너머의 세계를 그릴 상상력도 없다는 것이다. 기후변화가 요구하는 우리의 변화는 번번이 성장 앞에서 멈추어 선다.

COP26에서 ‘2030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종합한 결과는 2010년 대비 13.7% ‘증가’로 나왔다.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1.5도로 묶기 위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권고가 ‘‘2010년 대비 45% 감축’이니 황당한 결과다. 이대로라면 지구 평균기온은 2.4도 이상 오를 것으로 예측된다. 내년 말까지 2030 NDC를 다시 내기로 했지만,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거다. 길게는 100년까지 지속하는 온실가스의 대기 누적 효과로 미적거리며 감축을 늦출수록 상황은 급해지고, 그럴수록 감축 노력보다는 기술의 유혹이 커진다. 우리나라의 탄소중립 시나리오도 ‘탄소 포집·활용·저장(CCUS)’이라는 불확실한 미래 기술이 없으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필요한 규모의 CCUS를 적기에 확보한다 해도 저장 장소의 안전성과 같이 기술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미결로 남는다.

경제성장에 사회적 재앙 심화
기후변화 요구는 ‘바꾸라’는 것
변하지 않으면 가라앉을 것이란
진실을 외면하는 한 어떤 기술도
기후위기서 우리 건져낼 수 없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기술과 설비의 ‘절대 안전’은 모순어법이다. 실수든 재해든 사고는 일어나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짓고 있는 석탄화력발전소 공사 ‘중단’과 정치적으로 들이민 가덕도신공항을 비롯한 공항 건설계획의 ‘포기’는 안전 문제가 전혀 없을뿐더러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확실한 탄소 감축 방안이다. 그런데도 왜 ‘무엇을 하지 않는’ 쉽고 확실한 길을 마다하고 ‘무엇을 하는’ 어렵고 불확실한 길을 고집할까? 물론 명분이야 있겠지만, 결국 사업을 만들어내야 수익이 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위험(danger)’이 있는 기술도 왜 ‘위험(risk) 평가’라는 절차를 거쳐 애써 채택하려고 할까? 그 기술이 뿌리치기 어려울 만큼 큰 수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기술이 가져다준다는 편익에 홀려 기술의 방관자로 전락한 우리의 탓도 크다. 그런데 이렇게 생겨난 수익은 누가 가져갈까?

성장 체제는 그대로 둔 채 기술로 온실가스만 없애겠다는 것은 단물만 빼먹고 대가는 치르지 않겠다는 심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에서 공짜 점심은 없다. 지금 모를 뿐이지, 우리가 누린 편익의 대가는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든 치러야 한다. 부유한 소수가 누려온 화석연료의 편리와 풍요의 대가가 모두의 삶이 걸린 기후변화일 줄 그땐 몰랐다. 설혹 마법 같은 신기술로 온실가스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지금은 알 수 없는 계산서가 언젠가는 반드시 날아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복음’) 이 시대에 대한 기후변화의 요구는 ‘바꾸라’는 것이다. 근대화, 산업화란 이름으로 인간이 벌여온 행태가 자연이 더는 받아줄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으니, 생존하려면 바꾸라고 한다. 이것만이 잘 사는 길이라며 밀어붙인 경제성장이 사회적 재앙을 키워왔으니, 행복해지려면 바꾸라고 한다. 국제 여론조사업체 입소스의 ‘세계의 걱정거리’ 10월 조사에서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이 1위로, 기후변화가 10위로 나왔다. 이 둘은 성장이 곧 발전이고 진보라는 성장 이데올로기가 낳은 이란성 쌍둥이다.

기후변화가 요구하는 삶의 전환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면, 우리는 얼마나 무지한가. 알고 있다면, 성장 체제에 목매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체제 변화 없이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교만한가. “We are sinking, but so is everyone else.” 코페 장관의 말대로,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시기만 다를 뿐 결국 모두 가라앉을 것이다. 이 단순한 진실을 외면하는 한, 그 어떤 기술도 기후위기에서 우리를 건져낼 수 없다. 책임이 적은 사람과 지역이 먼저 기후변화에 희생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가 앉아 있는 가지를 톱으로 자르고 있을 것인가(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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