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잠’을 아시나요

조현철 신부·‘꿀잠’ 대표

어릴 때, 방학이 되면 어머니는 으레 나를 외갓집에 보내주셨다. 어려서 그랬겠지만 그땐 외갓집까지 버스 타고 가는 게 그렇게 좋았다. 아마도 날 반갑게 맞아주시는 외할머니와 이모가 계셔서 더 그랬을 것이다. 여름엔 또래들과 실컷 뛰어놀다 골목에 놓인 널찍한 평상에 누워 쉴 때의 기분 좋은 나른함, 겨울엔 잔뜩 빌려온 만화책을 옆에 쌓아두고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읽는 재미가 각별했다. 학교가 힘들거나 지루해질 때, 방학하면 다시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내게 힘이 됐던 외갓집은 어릴 적 내 마음의 보루였다. 지금도 마음이 스산해질 때면 나를 토닥여주는 소중한 기억이다.

조현철 신부·‘꿀잠’ 대표

조현철 신부·‘꿀잠’ 대표

노사문제가 생기면 노동자들은 ‘본사’에 가야 하는데, 본사는 대부분 서울에 있다. 문제가 하루 이틀에 끝날 것도 아니고 매일 다녀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낯선 곳 어디선가 묵어야 한다. 천막을 쳐도 덥거나 추운 데다 자동차 소음으로 선잠 자기 일쑤다. 며칠만 지나면, 누구나 꿀잠 생각이 굴뚝같아진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은 형편이 더 어렵다. 2016년 우리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여름방학 외갓집’같이 편하게 와서 꿀잠을 잘 수 있는 집을 짓기로 했다. 2017년 봄, 접근성 좋고 가격도 맞는 곳을 찾아 헤맨 끝에 영등포역과 신길역 근처의 한 건물을 매입했다. 안정되고 안락한 ‘외갓집’을 만든다고 좀 무리를 했지만 종교계, 문화예술계, 법조계, 사회활동가, 노동자 등 3000여명이 십시일반 모은 기금으로 건물을 무사히 인수했다. 이후 약 100일간 연인원 1000명이 비지땀을 흘리고 먼지를 먹으며 건물을 개축, 그해 8월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동안 매년 4000명가량이 꿀잠을 찾았고, 꿀잠을 자며 힘든 고비를 함께 넘었다. 꿀잠은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외갓집 같은 든든한 보루가 되었다.

꿀잠 입구에는 ‘여성 청소노동자’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조형물이 걸려 있다. 가장 낮은 곳의 사람이 가장 높이 솟아올라 차별과 억압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평등을 꿈꾸는 곳, 꿀잠이다. 꿀잠은 협동과 참여, 공유와 나눔이 일상인 곳, ‘공생공락’을 꿈꾸는 곳이다. 1층 카페 겸 식당엔 먹을 것이 풍성하다. 운이 좋으면, 전국 각지에서 꿀잠과 맺은 인연들이 보내오는 맛있고 귀한 먹을거리도 맛볼 수 있다. 뜻있는 의료인들이 먼저 제안하여 치과와 한방 진료를 하고 있다. 시장에 넘쳐나는 온갖 화려한 상품은 돈 있는 사람만 누리는 풍요지만, 꿀잠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근원적 풍요가 넘친다. 자본주의가 이윤 획득을 위해 만들어내는 인위적 희소성은 꿀잠에 발붙일 자리가 없다. 꿀잠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공재(commons)다.

비정규직들이 공생공락 꿈꾸는
‘꿀잠’이 재개발 위기에 내몰려
공공성 외면 땐 또 다른 ‘대장동’
그곳은 계속 있어야 한다
원하는 사람 많으니 그렇게 될 것

꿀잠에 위기가 닥쳤다. 지난해 3월 ‘신길제2구역주택재개발정비사업’이 인가됐고 꿀잠도 여기에 포함됐다. 재개발은 전체 소유주의 75% 이상 동의를 받으면 진행된다. 사유재산권을 거의 절대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최대 25%의 소유주가 반대해도 재개발을 할 수 있는 명분은 공공성과 공익성밖에 없을 것이다. 공공개발은 물론 민간개발에서도 존중하고 지켜야 할 원칙이다. 공공성을 저버리면 재개발사업은 투기성 돈벌이로 전락해 ‘대장동’ 같은 괴물이 튀어나온다.

코로나19 감염병 사태 이후 현장 의료진과 보건의료노조는 정부에 공공의료 체계의 강화를 요구하고 공공병원과 보건의료 인력 확충 예산 3600여억원을 요청했지만 별 진척이 없다. 재난지원금 예산이 모두 ‘조’ 단위였단 걸 생각하면 ‘공공’에 관한 정부의 인식이 어떤지 알 수 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비정규직노동자는 지난해보다 64만명 늘어난 806만6000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38.4%다. 플랫폼노동이 확산했고 고령층과 대면 서비스업에서도 비정규직이 늘었다. 임금은 정규직의 53%에 그쳤다. 비정규직 문제는 더 늘어날 것이고, 꿀잠도 할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런 판에 꿀잠에 재개발 문제가 닥쳤는데 주무관청인 영등포구청은 관심이 없다. 꿀잠은 영등포구청장 면담과 실무자 간담회 등에서 공공재로서의 꿀잠을 설명하고 대책 논의를 요청했지만, 기계적으로 절차를 따르겠다는 관료의 무감각만 확인했다. 재개발로 꿀잠이 없어지는 걸 방관하는 것은 공공성을 챙겨야 할 지자체의 직무유기다.

곧 성탄절이다. 2000년 전 베들레헴, 해산이 임박한 마리아와 요셉은 낯선 곳에서 방을 구하지 못했고 갓난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어야 했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구유가 위급한 상황의 두 사람에겐 세상 어떤 곳보다 소중한 곳이었다.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겐 꿀잠이 그런 곳이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찾아오는 한 꿀잠은 계속 있어야 한다. 그렇게 바라는 사람이 많으니 그렇게 될 것이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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