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적인 ‘박근혜 사면’

양권모 편집인
박근혜 전 대통령.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 연합뉴스

돌연한 ‘박근혜 사면’이 발표된 날, 왠지 광화문의 ‘그들’이 떠올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박근혜 무죄’ ‘탄핵 무효’를 목놓아 외쳐온 그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은사(恩赦)를 어찌 받아들일까.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입원 중인 병원 앞으로 달려간 그들은 맘껏 승리를 구가했다. “박근혜 대통령 석방은 정의를 되찾는 국민의 승리”라며 작약했다. 거짓 촛불, 사기 탄핵, 불법 인신감금이라 찰떡같이 믿었으니 ‘박근혜 석방=정의와 진실의 승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박근혜부터 과오를 추호도 인정 않고, “정치 보복”이라는 입장과 함께 사법절차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왔다. 진정한 반성도 사과도 없는 상황에서 이뤄진 사면은 그들에겐 ‘박근혜 무죄’ ‘정치 보복’의 확인증일 터이다. 사면을 통보받은 박근혜는 “빠른 시일 내에 국민 여러분께 직접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국민 여러분께 사과가 아니라 감사 인사다. 무엇을 뜻하겠는가.

양권모 편집인

양권모 편집인

오래전 일이지만, 기시감이 드는 광경이 있다. 1997년 12월22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전두환이 귀가할 때 연희동 골목을 가득 메운 환영 현수막과 지지자들의 환호 소리다.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듯한 그 열기가 뜨악했다. 전두환은 훗날 회고록에서 ‘사면은 나를 유죄라고 판단한 법원 결정이 애초부터 부당하거나 무리한 조치였다는 방증’이라고 기록했다. 반성과 사죄 없는 ‘전두환 사면’은 화합은커녕 반목과 갈등을 심화시키고 역사왜곡의 마중물이 되었다. ‘5·18 국론’마저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분열을 불러왔다. 전두환의 경우에서 보듯 ‘사면=국민통합’이라는 도그마는 친일파를 비롯해 수많은 역사청산의 실패를 불러왔다. 한국 사회가 매번 ‘지체된 정의’에 시달린 이유다.

문 대통령은 신년 회견에서 “잘못을 부정하고 재판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차원의 사면 요구는 국민들의 상식이 용납하지 않고, 국민이 공감하지 않는 사면은 오히려 국민통합을 해치게 된다”고 사면 원칙을 제시했다. 과오 인정과 사과, 국민 공감이라는 전제 조건은 해결된 게 하나도 없다. 절대군주의 은사권에서 유래하는 사면권은 제왕적 권력의 상징물 같은 것이다. 부당한 사면권 행사를 견제할 수 있는 건 여론밖에 없다. 문 대통령은 국민 의견도 묻지 않은 채 비밀작전하듯 사면을 단행했다. 사면권의 남용이다. ‘박근혜 탄핵’은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시민 저항과 참여를 통해 이뤄졌다. 본원적 질문도 가능하다. 국회 탄핵 소추와 헌재 판결을 통해 ‘탄핵당한 대통령’에 대해 과연 대통령이 ‘면죄’하고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있는가.

‘박근혜 사면’의 유일한 명분은 국민통합과 화합이라는 남루한 수사다. 사면이 국민통합에 기제가 되려면 압도적 국민이 ‘정의롭다’고 공감해야 한다. 청와대는 국민통합을 위한 문 대통령의 외로운 결단을 강조한다. 그렇게 “새 시대 개막의 계기”가 될 만큼 ‘박근혜 사면’이 절실했다면 진즉 했어야 했다. 대선을 목전에 두고 아무런 사정 변경도 없는데 돌연 단행된 ‘박근혜 사면’은 정치공학적 셈법이 우세종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면과 동시에 복권까지, 정치적 족쇄가 완전히 풀린 ‘박근혜’의 존재는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더욱이 5대 범죄 사범의 사면 제한 약속에 붙들려 못하던 한명숙 전 총리 복권을 함께 실시한 것도 가뜩이나 빈약한 사면의 진정성을 무너뜨렸다.

첨예해진 진영 갈등이 ‘박근혜 사면’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한국사회의첩첩한 정치사회적 갈등 구조를 간과한 것이다. 필시 ‘박근혜 사면’으로 정의, 법치, 화합, 갈등 치유 같은 가치는 얻을 수 없다. 전직 대통령의 재임 중 범죄를 너무 쉽게 용서하는 과오로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는 전례를 만들 수 있다. ‘박근혜 사면’에서 ‘전두환 사면’의 어두운 그림자가 자꾸 겹쳐지는 이유다.

진정한 반성과 사과도 없는 상태에서,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고려에 따라 이뤄진 ‘박근혜 사면’은 2016~2017년 뜨거운 광장의 역사를 광화문의 ‘그들’로 하여금 모독하게 만들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러려고 촛불 들었나”라는 탄식만으론 헛헛하다. 105개 시민사회·노동단체는 엊그제 청와대 앞 기자회견에서 “문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기만하고 정방향으로 향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린 자로 역사에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규탄했다. 내겐 트윗에 올라온 이 한 문장이 딱이다. “역사를 다시 돌려놓고 떠나는 문재인. 이런 걸 반동이라고 한다.”(이택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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