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구 우면산에 핵폐기물 시설을 짓는다면

한대광 전국사회부장
수도권 주민들의 쾌적한 삶 뒤에는 지방에서 전기를 만들어 보내고 쓰레기를 대신 태우는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경향신문과 이제석 광고연구소는 서울 강남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제작 : 이제석 광고연구소 ⓒ www.jeski.org

수도권 주민들의 쾌적한 삶 뒤에는 지방에서 전기를 만들어 보내고 쓰레기를 대신 태우는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경향신문과 이제석 광고연구소는 서울 강남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제작 : 이제석 광고연구소 ⓒ www.jeski.org

지난해 10월19일자 경향신문 7면에는 ‘강남 원전 설립 가상 조감도’가 큼지막하게 편집됐다. 강남 한복판에 원자력발전소가 가동 중인 듯한 그래픽이 등장한 것이다.

중·저준위 핵폐기물이 담긴 드럼통이 경주 방폐장에 쌓여 있다. 중·저준위 핵폐기물은 물론 폐연료봉 같은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 문제는 한국을 포함한 원전 보유국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고준위 핵폐기물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지만 현재까지 이를 완전히 해결한 나라는 없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중·저준위 핵폐기물이 담긴 드럼통이 경주 방폐장에 쌓여 있다. 중·저준위 핵폐기물은 물론 폐연료봉 같은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 문제는 한국을 포함한 원전 보유국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고준위 핵폐기물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지만 현재까지 이를 완전히 해결한 나라는 없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이 창간 75주년을 맞아 기획한 ‘절반의 한국’ 기사와 함께 제작된 그래픽이다. 창간기획팀 소속 문광호 기자는 이 기사의 마지막 단락에 “‘공정’의 가치는 수도권에서만 통용되는 것인가. 서울 사람들이 전기차를 타고 우아하게 생활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가. 전기 생산과 쓰레기 처리에서 ‘지산지소(地産地消)’의 원칙은 불가능한가”라며 “이 문제를 외면하는 한 수도권과 지방 간의 ‘심리적 분단’은 더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고 적었다.

그래픽은 이제석 광고연구소가 제작했다. ‘광고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이제석 대표는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대한민국의 고질적 문제로 생각하고 10여년 전부터 관련 캠페인을 해오고 있었는데 경향신문의 연락을 받고 흔쾌히 재능기부를 했다”면서 “당시 기획기사 목차가 ‘강남에 원전을 짓는다면’이어서 기사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고 독자들의 피부에 와닿게 만들려고 노력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기사의 반향은 컸다. 기획의도와 그래픽까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댓글 중에는 “강남 집값은 비수도권 사람들의 희생(핵발전소, 석탄발전소로 인한 환경피해)으로 올린 건데 불편한 진실을 잘 표현했다”는 격려도 있었다. “서울에 원전 하나 놓으면 수도권 전기 공급량 늘고 폭등한 집값 떨어질 테고…”라는 의견도 있었다.

한대광 전국사회부장

한대광 전국사회부장

서울에 원자력발전소나 핵폐기물 저장시설을 짓자는 아이디어나 의견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4년, 서울대 교수 63명은 관악산에 핵폐기물 관리시설을 유치하자고 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에서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유치가 주민 안전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과학적 확신을 바탕으로 서울대가 이 시설을 유치하는 방안을 검토해줄 것을 건의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구체적 방안으로 “서울대 관악산 터에는 이미 넓은 지하공간이 있어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뿐 아니라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의 영구 처분에 대비한 지하연구시설 유치에도 적절하다”고 했다.

이 주장은 그러나 논란만 불러일으킨 채 사그라들었다. 당시 부안 핵폐기장 찬반 논쟁이 한창이었는데 서울대 교수들의 주장이 자칫 검증되지 않은 핵폐기물의 안전성을 일방적으로 ‘부각’ 하려는 의도가 크다는 환경단체 등의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대가 위치한 관악구와 주민들의 반대도 거셌다.

최근 원자력발전소·석탄화력발전소 등 에너지 생산·폐기물 처리 시설의 지역 불균형 문제가 다시 논쟁이 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해 12월27일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사용후핵연료를 원전 부지에 한시 저장하겠다는 내용의 ‘제2차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안’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국회에도 관련 특별법안이 발의돼 있다.

영광·기장·울주·경주·울진 등 원전 소재 기초지자체와 광역지자체는 한목소리로 정부안 철회와 원점 재검토를 주장했다. 핵폐기물 처리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나 부지 마련 대안도 없이 한시 저장하겠다는 것은 ‘원전 인근 주민들에게 영구처분시설을 껴안고 살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우려 때문이다.

원전 인근 16개 기초지자체가 모인 ‘전국 원전 인근지역 도시동맹’(원전동맹)은 원전 가동에 따른 방사선비상계획구역에 포함되는 29개 기초·광역단체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광역별 고준위 폐기물 임시저장시설을 만드는 특별법을 만들자는 ‘대안’을 내놓았다. 수도권에도 핵폐기물 저장시설을 만들자는 것이다. 원전동맹의 주장은 2004년 서울대 교수들의 주장과는 ‘격’이 다르다. 당장에라도 검토해야 할 주제다.

2020년 기준 자료를 보면 서울은 4578만7926MWh의 전력을 소비하지만 생산은 11.1% 수준인 512만2000MWh에 불과하다. 서울은 소각장 하나 건설하는 문제조차 수년째 답을 찾지 못할 정도로 ‘이기주의’에 찌들어 있다. 원전 인근에는 314만명의 국민이 살고 있다. 이들은 지난 43년 동안 원전에 대한 불안감을 감수했다. 이들에게 핵폐기물에 대한 부담을 전가하는 것은 지역 이기적인 발상이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강남권 주택가를 비켜난 서초구 우면산에 핵폐기물 임시저장시설을 만드는 논의를 시작하면 어떨까. 물론 관악산도 논의 대상에 포함시키면 좋겠다.


Today`s HOT
이란 유명 래퍼 사형선고 반대 시위 올림픽 성화 범선 타고 프랑스로 출발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