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와 기억의 냉전체제

임지현 서강대 교수

1월27일은 유엔이 정한 ‘홀로코스트 기억의날’이다. 1945년 이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나치 강제수용소가 소련 적군에게 해방되었고,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인 2005년 유엔 총회는 매년 1월27일을 홀로코스트 추모일로 정했다. 유엔 헌장이나 인권선언, 제노사이드 협약 등에서 보듯이 제2, 제3의 홀로코스트를 방지하자는 국제적 공감대가 유엔 설립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이 추모일이 2005년에야 정해진 것은 생각보다 많이 늦었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

임지현 서강대 교수

이스라엘에서 히브리 달력으로 ‘니산’ 27일을 홀로코스트의날로 제정한 것은 1959년의 일이다. 제노사이드의 비극과 희생자들의 고통에 주목하는 유엔의 홀로코스트 추모일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념일은 1943년 4월19일 ‘니산’ 달에 일어난 바르샤바 게토 봉기의 영웅적 민족 전사들을 기리는 데 방점이 있다. 유엔의 홀로코스트 추모가 보편적인 인권의 고양과 맞닿아있다면,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억은 민족적 기억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제 홀로코스트는 <안네의 일기>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등 영화와 문학, 대중매체 등을 통해 비교적 널리 알려졌다. 나치라는 ‘절대 악’의 희생자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증폭되면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과 식민지, 분단, 한국전쟁, 개발독재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의 희생자들을 병치하는 일이 잦아졌다.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미국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뉴욕 한복판의 홀로코스트센터에서 만나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고, 태평양을 건넌 일본군 위안부 기억활동가들이 미국 내의 크고 작은 유대문화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도 더는 낯설지 않다. 국경을 넘는 기억의 지구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홀로코스트는 이미 한국인의 기억처럼 토착화되고 있다.

특히 1987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 홀로코스트는 ‘빨갱이 사냥’이라는 정치적 제노사이드의 희생자들에 대한 가슴을 울리는 기억을 끌어내는 장치로 자주 사용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아우슈비츠를 찾아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 나오기도 하고, 제주 4·3 학살을 ‘가스실 없는 한국판 홀로코스트’라고 묘사한 서사시도 있다. 이 작가들은 모두 냉전의 장벽이 무너진 덕분에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를 찾아 비극의 역사적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제주와 광주, 아우슈비츠를 연결하는 이들의 기억정치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홀로코스트를 빌려 남한 우익의 반공 제노사이드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 것은 이 비극의 기억을 망각의 늪에서 건져 올려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명예를 복권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문제도 적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의 기억정치가 여전히 냉전에 가위눌려 있다는 점이다. 북한 정권의 국가폭력이나 ‘인민의 적’에 대한 좌익의 학살을 언급하면 마치 우익의 ‘빨갱이’ 학살에 대한 비판이 희석되거나 무뎌진다는 식의 ‘제로섬게임’이 기억의 냉전을 지배하고 있다. 동유럽 사회주의 진영은 종주국 소련의 스탈린주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서방 진영은 동맹국 서독의 홀로코스트 대신 스탈린의 반유대주의를 강조했던 1950년대 냉전체제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민간인 학살’ 혹은 ‘양민 학살’로 표상되는 남한 우익의 정치적 제노사이드는 홀로코스트보다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나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 ‘굴락’과 같이 배치될 때, 기억의 유비가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좌익의 민간인 학살이나 북한의 정치범죄에 대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는 긴 침묵 속에 누워 있다.

이들이 펼치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제로섬게임의 반대편에는 ‘북한 홀로코스트 기념관 추진위원회’가 있다. 문재인 정권의 재야세력인 이들이 주최한 ‘북한 홀로코스트 사진전’은 아우슈비츠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병렬·전시하여 북한의 인권에 대한 각성을 촉구한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가 아우슈비츠보다 더 끔찍하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그러면서도 남한의 민간인 학살이나 우익의 제노사이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21세기 한반도의 기억문화는 여전히 1950년대의 진영론적 냉전체제에 갇혀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를 향한 첫발은 기억의 냉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죽은 자의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빨갱이’로 몰려 죽거나 ‘인민의 적’으로 몰려 죽거나 원통하기는 매한가지다. 지금 대선판에서 ‘죽은 자’에 대한 공약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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