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부 폐지, 윤석열이 꿈꾸는 세상은 뭔가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그래서 여성가족부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달 7일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를 올리며 젠더 이슈를 핫 이슈로 끌어올린 지 한 달이 되어간다. 암호에 가까운 일곱 글자, 공약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한 달이 되도록 진지한 후속 논의나 설명은 없다. 원희룡 국민의힘 선대본부 정책본부장은 최근 “일단 해체부터 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1월25일 세계일보 인터뷰)고 밝혔다. 무책임하다. 나머지 주요 후보들은 모두 초기 입장을 견지한 예측 가능한 방향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여가부를 (성)평등가족부로 바꾸고 일부 기능을 조정하는 방안을,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성평등인권부로 바꾸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여가부를 성평등부로 개편하고 역할과 권한 강화를 약속했다.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여성가족부는 2001년 김대중 정부에서 출범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여성 정책 공약을 내놓던 터였다.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도 여성부 신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여가부 출범 뒤엔 기혼여성노동자의 급증에 따라 양육과 돌봄의 문제를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는 거센 요구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저출생 문제까지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 인력과 예산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여가부는 성매매방지법 제정, 호주제 폐지, 모성보호 3법 도입과 남녀고용평등법 개정·보완 등 굵직한 일들에 중요 역할을 했다.

2022년 여가부 예산은 1조4650억원으로 정부 전체 예산의 0.24%에 불과하다. “여성만을 위한 부처” “남녀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일지만, 여가부 예산의 61.9%(9063억원)는 아동양육비 등 한부모 가족과 1인 가구 지원, 아이돌봄 서비스 등 남녀 구분 없는 가족 관련 정책에 쓰인다. 그다음으로 많은 예산(18.5%, 2716억원)은 위기청소년, 학교 밖 청소년 등을 지원하는 청소년 관련 사업에 돌아간다. ‘여성·성평등’ 예산은 7.2%(1055억원)다. 이 중 상당 부분(737억원)은 경력단절여성 지원에 투입된다. 일각에선 업무 중첩과 종합성을 고려해 여가부의 역할을 보건복지부나 교육부, 고용노동부 등 다른 부처로 나누면 된다고 주장하지만, 각 부처로 가면 부처 고유업무에 여가부의 기존 업무가 밀릴 수밖에 없다. 모두의 책임은 아무의 책임도 아니게 된다.

2020년 5월 기준, 전 세계 97개국에 ‘여성·성평등’ 관련 장관급 부처가 있다. 다양성과 성평등 관점은 세계적으로도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여러모로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한국의 최근 ‘안티 페미니즘’은 선진국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미 언론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지난 24일 자신이 진행하는 CNN방송 프로그램에서 ‘한국의 놀라운 반페미니스트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다뤘다. 그는 선진국 중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크고 상장사 여성 임원 비율이 5%에 불과한 나라에서 젊은 남성들의 반여성주의 운동과, 이들의 환심을 사려는 우파 정치인들의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을 전하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라고 반문했다.

다시 국민의힘과 윤석열로 돌아가보자. 윤 후보는 지난해 10월 여가부를 ‘양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하겠다고 약속했다. 페미니스트 정치인 신지예씨를 영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달 이준석 대표와의 갈등 봉합 직후 여가부 폐지를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입장으로 급선회했다. 여가부 폐지 이후의 대안은 저출생 대책에 주력한 인구가족부쯤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조각조각 나오고 있는 공약들도 출산과 보육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성을 저출산 극복의 도구로 삼았다는 비판을 받은 ‘대한민국 출산지도’ 파동, 젠더 관점이 결여된 국가주의 출산장려 정책이 얼마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었는지 잊은 걸까.

후보도, 정당도 입장이 바뀔 순 있다. 그러나 최소한 충분한 설명과 설득이 따라야 한다. 20년 넘게 지속됐던 정부 부처를 없애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국제적 추세를 거스르는 움직임이다. 급변하는 사회, 다양화되는 가족 상황에서, 사회 전반의 성평등 요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여가부의 역할은 향후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걸린 현안이다. 장난 같은 일곱 글자와 맥락 없는 파편적 공약으로 다뤄선 안 되는 문제다. 그런데, 아직껏 여가부를 왜 폐지하자는 건지, 어떤 대안, 어떤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그렇게 만만한가. 이런 무책임, 이런 오만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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