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판 서문을 쓰는 마음

인아영 문학평론가

“왜 꼭 빤한 작가 서문이라는 걸 써야 되는지 그 부담감이 소설 한 편 만들기보다 훨씬 괴롭다”고 말한 사람은 박완서 작가였다. 단편, 장편, 에세이 가릴 것 없이 숱한 책을 내고 전집 서문도 여러 차례 썼으니 이골이 났을 법도 하다. 곤경을 토로한 일이 무색하게도 그의 서문과 후기만을 모은 책(<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작가정신, 2020)까지 발간된 것을 보면, 글쓰기의 고통과 그 성취는 무관하거나 오히려 비례하는지도 모르겠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독자로서 유난히 마음을 쓰며 눈여겨보는 지면 중 하나는 ‘개정판’ 서문이다. 초판 서문을 쓸 수 있는 기회도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아 새옷으로 갈아입은 책 앞에 다시 한 번 서는 일은 더욱 드물고 귀하다. 베스트셀러도 1~2년이 안 되어 쉬 잊히곤 하는 것이 흔한 세상사라서일까. 새 책을 내는 설렘과는 달리 개정판 서문에는 자신의 글뿐만 아니라 흘러가는 세월을 대하는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한다.

서문 쓰기가 그리 괴롭다던 박완서 작가는 30년 동안 썼던 단편소설을 전집으로 묶은 지 7년 만에 한 권을 더 보탠 개정판을 내면서 아득한 서문을 남긴다. “한때는 글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처럼 치열하게 산 적도 있었나본데 이제 와 생각하니 겨우 문틈으로 엿본 한정된 세상을 증언했을 뿐이라는 걸 알겠다. (…) 남들이 미덕으로 치는 일 욕심도 지나치면 오히려 돈 욕심보다 더 딱하게 보이는 노경에 이르렀다는 걸 무슨 수로 숨기겠는가.”(<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문학동네, 2006) 마흔에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해 누구보다 의욕적으로 창작해왔을 자신의 결실 앞에 면구스러워하는 노작가의 겸양은 온 힘으로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닐는지.

문학사에서 유명한 개정판 서문으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1831년판도 있다. 21살의 어린 여자가 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녀의 병적인 상상력이라는 혹평을 받았다가 13년 만에 상당 부분을 개작한 1831년판의 서문은 ‘당시 어린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상세한 대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음을 울리는 대목은 따로 있다. “내가 이 작품에 애착을 느끼는 것은 행복하던 시절, 죽음과 슬픔은 그저 단어일 뿐 내 가슴에서 현실적인 울림을 찾아볼 수 없던 시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사이 두 아이와 남편의 사망을 연달아 겪은 셸리에게 개정판 서문을 쓰는 일은 소중한 첫 작품과 뗄 수 없이 뒤얽힌 생애를 다시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었나보다.

저자가 유명해지자 묻혀 있던 초기작이 세상의 빛을 보는 일도 더러 있다. 영문학자이자 비평가인 이브 세즈윅은 퀴어 이론가로 이름을 떨친 뒤 남성 동성 욕망을 다룬 초기작 <Between Men>(1985) 앞에 다시 펜을 든다. 8년 전에 썼던 책을 다시 읽으니 당시에 대체 어떤 무모함으로 집필했는지 모르겠다는 진솔한 고백으로 서문은 시작된다. 강사로서 직업도 불안정하고 연구 분야도 인기 없던 시절, 아무런 자신감도 없었지만 책 쓰는 일만은 즐거운 모험이자 특권으로 여겨지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당시의 분석이 얼마나 얄팍했는지 경악스럽다며 혹독하게 자기반성을 하면서도, 세간의 비판을 나름으로 소화하여 수용, 해명, 반박하려는 노력은 어떤 변명이나 이론의 수정보다 감동적이다.

그러고 보면 개정판 서문만큼 움츠러든 마음에 격려가 되는 글도 드물다. 부끄러움, 애착, 질책이 뒤섞인 마음으로 과거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 아마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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