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반대신문을 허할 것인가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설연휴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감정을 추슬러 보아도 스멀스멀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이유는 바로 미성년자 내일을 송두리째 앗아갈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겠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

19세 미만 미성년자가 성폭력 피해자인 경우 피해자 진술이 촬영된 녹화영상을 증거로 채택할 수 있는 규정이 ‘성폭력처벌법’에 있었다. 이런 규정이 없다면 피고인 측은 아무런 제한 없이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청해 2차 가해를 할 수 있어서다.

일반적으로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는 수사단계에서부터 공판단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2차 가해성 발언을 스스럼없이 한다. 이를 넘어 공판정에서 미성년 성폭행 피해자를 증인으로 세우려고 여러 수단을 강구한다. 미성년자가 친족 간 성폭력 피해자인 경우, 증인이 되면 상황은 더 끔찍하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피고인이 직접 피해자에게 증인신문을 할 수 있다. 피해자는 피고인 목소리를 온전히 들어야 한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피해자 머리는 하얗게 변할 것이다.

그런데 2021년 12월23일 헌법재판소는 이 규정을 위헌으로 판단해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녹화영상을 증거로 채택하면 피고인 반대신문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게 이유다. 이번 판단으로 아무런 제한이 없어졌다. 피고인 측은 미성년 피해자를 ‘증인’으로 세울 것이다. 오늘 당장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는 법정에 나와 증인이 되어야 하고 피고인 측 반대신문에 답해야 한다. 가혹한 2차 가해가 시작될 것이다. 막아야 한다.

2차 가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헌법재판소 판결을 뒤집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없다. 그럼 당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법원이 할 수 있는 일을 바로 하는 것이고, 국회와 법무부도 해야 할 일을 즉시 하는 것이다.

법원행정처는 각급 법원에 성폭력 미성년자가 진술할 수 있는 친환경적 장소가 있는지 또 영상녹화시설 등 물적 설비가 갖추어졌는지 조사해야 한다. 부족하면 예산 편성을 변경해서 장소를 개선하고 장비를 보충·보완해야 한다. 그리고 재판장의 소송지휘권을 통해 2차 가해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 법원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음으로 국회는 헌재 판결 이후 후속 입법을 마련하고, 법무부도 국회에 법안을 제출해야 한다.

사견으로는 법정에서 피해자가 진술하는 방식은 반대한다. 수사단계에서 진술한 피해자가 다시 법정에서 진술하는 것 자체가 2차 가해다. 그리고 아동일수록 시일이 지난 뒤에 하는 법정 진술은 오염 가능성이 있다. 처벌받아야 할 범인을 놓칠 수 있다. 그러므로 수사단계에서 한 피해자 진술이 법정에서 예외 없이 증거로 채택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최고의 방법은 ‘증거보전’ 청구다.

다만 ‘증거보전’ 절차 역시 반대신문이 허용된다. 2차 가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2차 가해를 막는 필요불가결한 조치를 해 두어야 한다. 첫째, 사전에 반대신문 내용을 제출하여야 하고, 다른 내용을 질문하는 경우 반대신문은 종료되어야 한다. 둘째, 반대신문은 피의자 측이 직접 질문하지 말고 진술조력인을 통해서 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친족 간 성폭력일 때 피의자 친족이 신뢰관계자로 동석해서는 안 된다. 넷째, 증거보전 절차에서 반대신문 기회를 보장했다면 이후 법정에서 피해자를 다시 증인으로 신청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형사정책은 유토피아를 그리는 이론이 아니다. 오늘 일어나고 있는 현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2차 가해를 막아달라고 아동정책조정위원회에서 총리에게 건의했고, 국회·법원·법무부·경찰에 직간접적으로 의견을 분명하게 전했다.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 장치 없이 가해자 앞에 세워 미래를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는 반대신문은 절대 불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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