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존엄의 대결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진실이 힘을 잃고 있다.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기준들조차 조롱받는다. 정치판은 그 극단을 보여준다. 편가르기가 정치의 본질이라면 지금 대선처럼 무논리, 반이성이 판치면 결국 분노동원 세력이 축배를 들 것이다.

사바나의 자연상태에서 메타버스 인공세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불확정성이다. 정글에선 사자가 달려오는 것보다 저편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 더 무섭다.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무지는 불안의 원천이면서 자유의 약탈자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안다는 것은 그곳으로 갈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헤겔이 자유를 필연성의 인식이라고 말한 까닭이다. 문제는 앎이 커질수록 자유만이 아니라 무지도 확장된다는 것이다.

많이 아는 사람은 스스로 모르는 것이 많음을 인정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나의 무지를 자각하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와 헤겔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무지를 자각하며 앎을 확장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다.

그러나 앎의 확장과 무지의 자각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 그렇게 편안한 세계는 이제 없다. 현대사회에서 앎과 자유의 관계가 옛 철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단계에 진입했다. 모든 사회적 관계가 앎과 인식의 영역을 벗어났다. 삼강오륜과 그것의 다양한 변이는 이제 자유가 아니라 구속일 뿐이다.

나치와 트럼프 낳은 분노처럼
남성들의 지체된 분노 의식이
‘검찰공화국’을 부르고 있다
분노가 아닌 서로 존엄할 수 있는
지금 여기의 선택은 없는 걸까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오랫동안 배우며 지켜온 규범의 모형들이다. 위계적·권위적·차별적일지언정 사회적 만남과 소통의 불확실성을 제거해온 규범들이다. 그래서 이 규범에 짓눌려온 사람들조차 안정과 안락을 위해 이를 전승하고 전파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이 규범들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사회는 사라졌다.

‘지금, 여기’, 모든 사회적 관계의 규범은 확정되어 있지 않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선생과 학생, 선배와 후배, 직장 상급자와 하급자, 고용자와 노동자,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만남과 소통을 규율할 수 있는 확정적 규범은 이제 없다. 이미 사라진 규범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의식지체 현상을 겪는 꼰대로 살거나 까닭 없이 화를 내는 습관성 분노조절장애 집단에 포섭된다.

관계를 규율하는 규범은 이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매번 다시 협상과 타협을 통해 재구성해야 한다. 전통적 규범이나 사람에 대한 유사 과학적 지식의 확장으로 불확정성은 해소되지 않는다. MBTI로 관계의 불확정성을 줄여보려는 사람이 많으나 중요한 관계에선 위험하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불확정성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상호주관적 소통과 협의다. 상호주관성은 상호 존중과 신뢰의 기반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축적하는 힘이다. 상호주관성은 관계를 맺는 타인을 그의 입장에서 믿고 높이는 것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와 반대다. 타인의 생각은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이 상호주관성, 상호존중이다.

이번 대선은 날로 커지는 불확정성을 해소하는 두 진영의 대결로 압축되고 있다. 한쪽이 상호존중의 길을 가고 있다면 다른 쪽은 분노와 증오를 증폭시킨다. 분노 증폭 세력은 계층과 지위, 세대를 넘어 성별 관계에서조차 커져가는 불확정성 때문에 생기는 불안을 상호 무시와 혐오로 이끈다.

불확정성에 신음하는 남성의 고통을 이용한 이준석의 교묘한 분노 조작 정치가 음흉한 빛을 발한다. 그는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Homo Iracundus)의 배후조정자다. 세네카가 <분노론>에서 말했듯 분노는 실익이 없다. 남성의 고통에 관하여 가장 감각적이면서도 정교한 이론을 제공한 골드버그(H Goldberg)에 따르면 이 상황에서 분노하는 남성은 오히려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신체 저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몸의 소리를 듣고 호응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남성 특권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남성의 감정과 몸성을 억누르던 규율체계뿐이다. 이것조차 버리면 모든 것이 더 불확실하고 불안하다. 그렇다고 이 상태에서 계속 표류하면 분노만 커진다. 백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득을 취해온 사람들이 소수민족에게 분노를 폭발한 것이 나치다. 백인 남자라는 이유 하나로 안정된 고소득 생산직 노동자로 살아온 사람들의 분노가 도널드 트럼프를 탄생시켰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지체된 분노 의식이 ‘검찰공화국’을 부른다. 분노가 아니라 서로 존엄할 수 있는 선택은 없을까?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