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비무장지대(DMZ)를 가면 우리 소원인 통일이 인류평화임을 절감한다. 설 앞에 경기도 연천군 DMZ를 찾았다. 이곳에 묻혀 300년이 훌쩍 지난, 미수 허목이 일러주는 통일의 메시지는 지금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 문화가 없는 통일은 구호일 뿐이라는 것이다. 6자회담도 북·미 회담의 운전자론도 좋지만, 남북과 동서의 통일, 그리고 평화의 예술망 연결이 병행되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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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년 임진왜란 와중에 전쟁동이로 태어난 미수는 41세(1636) 때 병자호란까지 당하였다. 그 즈음 일본은 에도시대로 대전환되었고, 중국도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되었다. 조선에서 벌어진 임진·병자 양란으로 동아시아 세계가 뒤집어졌으니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라는 땅은 세계를 지지고 볶고 삶는 프라이팬이 아니면 용광로이다. 미수의 당대나 300년 뒤의 청일 및 러일전쟁, 한일강제병합, 6·25전쟁의 상황은 빼닮았다.

양란 와중에 조선은 에도정권에 통신사를 파견하거나 북벌을 논하며 소중화를 자처하였다. 하지만 미수의 붓끝은 현실 개혁의 방안으로 고학(古學)을 통해 ‘조선’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데 88년이라는 평생을 파고들었다. 남인과 노론의 목숨을 건 예송논쟁 속에서 주자도 넘고 공자도 뛰어넘어 삼대(三代)의 이상세계를 조선 땅에 구현시키고자 한 것이다. 성리학 시대, 사문난적에 해당하는 고경(古經), 고문(古文), 고전(古篆)으로 일이관지한 일은 미수가 아니고는 없었다. 79세(1673)에 쓴 <동사(東事)> 서문은 시작부터 “신시(神市)와 단군의 시대는 중국으로 보면 제곡, 당요, 우순의 시대에 해당한다”면서 단군조선을 중국과 병치시키고 있다. 300여년 전, 미수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중국의 동북공정, 문화공정을 제대로 들배지기해내고 있다. 기자조선의 조두(俎豆)며, 숙신이 주공에게 석노를 조공한 일, 마한·변한·진한의 삼한이 78개의 속국을 거느린 일, 예맥과 말갈·발해·거란의 역사, 가락과 대가야, 탐라, 흑치까지 신화 속의 우리 고대사를 가계부 적듯 밝혀내고 있다.

조선역사에서 17세기는 양란의 혼돈 속에 도학(道學)의 공소함을 극복하고자 실학에 눈을 뜬 때로, 극심한 당쟁시대로 각인되어있다. 이런 칸막이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조선을 탐사하는 미수의 열린 민족주의는 분명 평지돌출이다. 글씨만 해도 소위 송준길·송시열의 ‘양송체’와 명청교체기 중국에서 수입된 전서와 예서가 유행할 때다. 그런데 족보에도 없는 하우전을 교과서로 해독 불가능의 ‘미수전’을 만든 것은 당대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죽했으면 판서 이정영이 미수체를 금하라는 상소까지 올렸겠는가. 지금도 서예사에서 하우전은 전설적인 글씨로 취급하다보니 미수체도 정통이 아니라는 누명을 쓴다.

하지만 미수체는 조형의 전복성은 물론 내용과 정신성까지 알고 보면 신기(神氣)의 엑기스다. 동해바다 쓰나미도 잠재우는 신령한 글씨로 온 조선에 이름을 날린 미수의 ‘척주동해비’는 이렇게 동해를 노래하고 있다. “부상(扶桑)과 사화(沙華), 흑치(黑齒)와 마라(麻羅), 상투 튼 보가, 남중국해의 굴과 조개, 과와(瓜蛙,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원숭이, 인도의 소, 바다 밖 잡종으로 무리가 다르고 풍속이 다르나 같은 곳에 모여 함께 자라는 도다.” 여기에서 부상은 일본을, 사화·흑치·마라는 동남해와 중국, 말레이반도에 사는 사람을 지칭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 다문화가정의 우주적 차원의 노래이자 사람, 바다고기, 육지동물들이 다 함께 사는 공화국이 동해다. 바로 단군의 홍익인간의 세계가 동해바다에 펼쳐진 것이다.

동해비에 박힌 미수체 조형의 깊이와 넓이를 여기서 확인한다. 이렇게 내용부터 심대 광활하니 현실만 좇는 사람들한테는 미수의 글씨가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미수체의 오해는 바로 미수의 고조선 찾기 행적에서 풀린다. 고학과 우리 역사를 종횡으로 엮어 민족 서예와 동아시아 서예의 원점을 관통해낸 미수체야말로 정통 중의 정통이다. 그래서 미수체는 300년 전에 이미 포스트 팬데믹을 노래한 ‘홍익인간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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