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공정’ 말고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영어단어 퀴어(queer)의 뜻을 그대로 번역하면 ‘이상한’ ‘기묘한’이라는 뜻이다. 성정체성,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 주로 동성애자를 경멸적으로 지칭했던 단어다. 지금 누군가를 ‘퀴어’라고 한다면 혐오발언이 될까. 그건 아니다. 성소수자들이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퀴어’라 불렀고, 이는 성소수자 권리운동에서도 적극적으로 쓰이기 시작해 이제는 성소수자를 포괄적으로 어우르는 단어가 됐다. 성소수자가 자신의 권리를 소리 높여 말하는 ‘퀴어문화축제’라는 이름을 누가 붙였겠는가.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갑자기 잘 알지도 못하는 단어의 유래를 늘어놓는 것은, 혐오표현에 맞서는 대항표현만 생각해왔지, 그 반대의 상황에 처할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긍정의 가치, 정의와 진보의 가치가 담긴 단어를 되도록이면 언급하지 않으려는 이 상황이 우습다. 다시는 이 지면에, 혹은 나의 발화가 기록될 수 있는 곳에서 ‘공정’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려고 했다. 정치의 언어가 되어버린 ‘공정’에는 뜻이 없고, 그 어떤 대안도 마련되지 않은 채 청년 삶에 독이 되는 방향으로 남발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럼에도 또 공정이란 이름을 꺼내든 것은 “무너진 공정과 상식”을 바로 세우겠다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캐치프레이즈 때문이다. “무너진 공정과 상식”이라는 문구가 음성으로도, 문자로도 뜨는 후보자의 TV 광고에는 보통 시민의 얼굴이 나온다. 입사 면접에 주눅 든 청년, 높은 집값에 부동산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서민의 얼굴이 비친다. 캠프 측 청년본부장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취업준비생으로 등장한 청년은 “부모 찬스로 입시와 취업하는 내로남불 기득권의 자녀들”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이쯤되면 의아해지는 것이다. 과연 그런 사회는 누가 만들었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그는 무슨 공약을 내놓았나.

오히려 ‘공정’을 전면적으로 해치는 약속만 내고 있지는 않나. 윤 후보는 주식양도세를 완전 폐지하겠다고 공약하기도 했다. 개미투자자, 가상자산과 주식 등 금융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청년층을 겨냥한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 내용은 기회의 불균등에 분노하는 청년, 개미투자자와는 관계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주식양도세는 현재의 안으로만 봐도 양도차액 5000만원까지는 내지 않아도 된다. 이보다 더 버는 개미투자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투자할 수 있는 자산의 규모에서부터 박탈감을 느끼는데, 거대 자본에 세금을 물리지 않겠다는 약속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짜 서민, 청년을 위한다면 생태계를 해치는 교란종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 부자 감세는 교란종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다름없다.

20대 청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년 일자리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분의 1은 노동의욕 저하의 원인으로 부동산 가격 폭등을 꼽았다. 부동산 폭등뿐일까. 코인으로, 주식으로 돈을 벌면 벌수록 노동의 의미를 잃어가는 주변 친구들만 봐도 공허함의 원인은 뻔하다. 열심히 일해도 내 삶의 불안을 해소할 수 없는 사회. 청년이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사회를 만든 기존의 체계를 책임지고 바꾸겠다는 약속이다.

공정은 빼앗겼다. 공정이란 이름 뒤에 지워진 삶의 격차를 정치가 보지 못할 때, 공정과 상식은 이때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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