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륜용달차와 ‘사랑과 야망’

이광표 서원대 교수
51년째 운행 중인 삼륜트럭 T-600.

51년째 운행 중인 삼륜트럭 T-600.

<사랑과 야망>이란 TV 드라마가 있었다. 1987년 1월부터 12월까지 방송된 주말드라마. 김수현 극본에 김용림, 남성훈, 차화연, 이덕화 등이 주연을 맡았다. 재미와 몰입감은 정말로 대단했고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이 드라마에서 이덕화가 작은 용달차를 몰고 다니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바퀴가 셋 달린 작고 귀여운 분홍색 용달차.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 서원대 교수

얼마 전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서 삼륜 용달차를 조사하게 되었다. <사랑과 야망>에 나왔던 바로 그 차였다. 기아산업(기아의 전신)이 1972년 생산한 기아마스타 T-600이다. 배기량은 577cc, 적재량은 500㎏. 51년 된 이 용달차는 놀랍게도 현재 운행 중인 공식 등록차량이다. 초록색 번호판이 반듯하게 붙어 있다.

기아산업은 1969년부터 1974년까지 T-600을 7700여대 생산했다. 1972년 롯데제과는 영업과 운반을 위해 T-600을 구입하여 대리점주들에게 한 대씩 지급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 차였다. 그때 대리점주였던 이국현씨(78)는 지금까지 이 차량을 운행하고 있다.

당시 신문광고에 이런 카피가 보인다. “소자본으로 성공하는 길-기아마스타 600이 그 열쇠입니다.” T-600은 앞바퀴가 하나여서 회전 반경이 작다. 골목이나 시장을 운행하는 데 제격이었다. 못 가는 곳이 없었고 그래서 1970년대 큰 인기를 끌었다. 귀엽고 친근한 디자인도 한몫했다. ‘고바우 영감’의 시사만화가 김성환이 그린 서울의 달동네 풍속화에도 T-600이 등장한다. T-600은 용달운수업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앞바퀴가 하나여서 다소 불안정하다. 그로 인해 종종 교통사고를 야기했고 1972년부터 고속도로 통행이 금지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1980년대 말이 되자 T-600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이씨의 T-600은 여전히 도로를 달렸고 희소성 덕분에 더욱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사랑과 야망>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신문, 잡지, 방송에 100여차례 소개되었고 광주비엔날레, 올드카 페스티벌 등 다양한 행사에도 선보였다.

이씨의 T-600은 전체적으로 노후했지만 상태는 양호하다. ‘기아마스타(Kia Mastar)’ 상표가 여전히 붙어 있고 운행에도 전혀 지장이 없다. 이 작은 차가 50여년을 견뎌올 수 있었던 것은 이씨의 애정과 자부심 덕분이다. 이씨는 꼼꼼하게 차량을 관리해 왔다. 일부 부품의 여유분을 몇 세트씩 준비해 부품의 단종(斷種)에 대비해 놓았을 정도다.

50년 넘은 차량을 지금도 운행 중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랍다. 내력과 스토리도 풍부하고 흥미롭다. 매연 저감 장치를 부착할 수가 없어 어려움도 있고, 유일한 차종이다보니 보험료를 산출할 근거가 부족해 종합보험에는 가입하지 못했다고 한다. 차량의 외관이 워낙 특이하다보니 차를 몰고 나가면 불법 개조 차량으로 오인해 경찰이 단속을 하는 경우도 있다. 듣는 사람에게는 재밌는 얘기지만 차량 주인에게는 불편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새 차로 바꿨을 텐데 이씨는 T-600을 고집해 왔다.

T-600은 현재 이씨의 차량을 포함해 10여대가 남아 있다. 다른 T-600은 푸른색 계통이지만 이씨의 T-600은 분홍색 계통이다. 당시 롯데제과가 일괄적으로 화물칸을 붙이고 외부를 분홍색으로 도색했기 때문이다. 화물칸 뒤쪽에는 아직도 ‘롯데시흥상사’란 글씨가 선명하다. 1972년이면 롯데껌 3총사 쥬시후레쉬, 후레쉬민트, 스피아민트가 처음 나와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때가 아닌가. 분홍색 T-600은 껌과 과자를 가득 싣고 시장길, 골목길 가리지 않고 곳곳을 누볐을 것이다. 가수 윤형주의 롯데껌 CM송이 절로 떠오른다.

우리네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1972년생 T-600. 기분 좋은 근대유산, 살아 있는 근대유산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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