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논리, 우크라이나의 이야기

백승찬 문화부 차장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압도적인 군사력의 러시아가 조기에 전쟁을 끝내리라는 예상은 빗나가는 중이다. 초조해진 러시아가 조금 더 과격한 수단을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백승찬 문화부 차장

블라디미르 푸틴은 침공 3일 전인 지난달 21일 55분간의 TV 연설에서 침공의 논리를 설명했다. 그는 상세한 통계와 함께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부채탕감 의무를 떠안으면서도 독립한 국가들에 경제적 지원을 했지만, 우크라이나는 반러시아 행보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냉전 시절 소련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소련 붕괴 이후 약속을 어기고 러시아 쪽으로 동진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한다면 러시아는 나토와 국경을 맞대는 모양새가 된다. 푸틴은 이를 두고 “목구멍에 칼을 들이댄다”고 표현했다.

푸틴이 논리를 댔을 때 우크라이나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작은 우크라이나가 강대국 러시아의 침략을 버텨내는 과정이 속속들이 전해진다. 먼저 침략자들에 맞서기 위해 앞장서는 시민들의 이야기가 있다.

한 젊은 커플이 서둘러 결혼식을 올린 후 곧바로 동반입대하며 소총을 들고 인증샷을 남겼다. 교사, 주부가 공터에 모여 맥주병을 화염병으로 만드는 장면도 공개됐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재연하기라도 하듯, 러시아 탱크를 맨몸으로 막으려는 시민의 사진도 찍혔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총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참전을 위해 조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뱀섬(Snake island)을 지키던 국경수비대원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는 러시아 전함의 권고에 “너나 나가 죽어”라고 대응했다.

사진 한 장에 힘 잃은 푸틴의 논리

코미디언 출신의 ‘초보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결사항전의 상징이 됐다. 그는 수도를 탈출하도록 돕겠다는 미국의 제안에 “대피수단이 아니라 총알을 달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시민의 저항을 독려하고 있다.

여성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한 수십만명의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났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채 혹독한 추위 속에 몇 시간을 걷고 또 걷는 모습이 타전됐다. 어떤 아이는 아끼던 곰인형 하나만을 들었고, 어떤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비눗방울을 분다. 엄마 품에 안겨 우는 아이도 있다.

죽은 소녀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슬프다.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가족과 함께 슈퍼마켓에 다녀오던 6세 소녀는 러시아의 폭격을 당해 병원에 실려왔다. 무력한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짓고 있다. 의사들이 필사적으로 소생을 시도했지만 유니콘이 그려진 바지를 입은 소녀는 눈을 뜨지 못했다. 아이의 작은 시신은 간이 철제 침대에 덩그러니 놓였다. 사진을 찍는 기자를 향해 의사가 외쳤다. “이 사진을 푸틴에게 보여라. 아이의 눈빛과 우는 의사를!”

푸틴에게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요약하면 ‘상대가 나를 해칠지 몰라 내가 먼저 해쳤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가해자보다 훨씬 작고 연약했다. 문명 세계의 어느 판사도 받아들이지 않을 논리다. 이러한 논리마저 죽은 소녀의 사진 한 장으로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정치든 전쟁이든 국익에 대한 냉정한 계산과 필요에 따라 전개된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건 그 모든 정략, 전략도 강력한 이야기가 부르는 보편의 감수성을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200년 역사의 중립국 스위스, 군사적 중립국 스웨덴과 핀란드, 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사적 대결을 자제해온 독일이 그동안의 외교정책을 뒤집고 반러 깃발을 들었다는 점은 어느새 선악 대결 구도가 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립 양상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편에는 중국, 북한, 벨라루스 같은 독재국가뿐이다.

전쟁선 이길지 모르지만 그는 졌다

유발 하라리는 가디언 기고에서 “국가는 이야기 위에 세워진다. 날이 갈수록 우크라이나인들은 향후의 어두운 날에 대한 것뿐 아니라 다가올 세대에 들려줄 이야기를 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라리는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제국의 사망증명서에 이름을 남겼다. 이젠 푸틴의 차례”라고도 했다. 푸틴이 남은 전투에서 이길지 모르지만, 그는 이미 궁극적으로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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