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속 영웅과 비루한 현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환상 속 영웅과 비루한 현실

언젠가 원하는 것을 갖는 비극과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비극에 대해 글을 쓴 바가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말하자면 원하는 것을 갖게 된 비극을 보여준다. 평생 늙고 싶지 않은 욕망, 죽고 싶지 않은 욕망은 실현 불가능하다. 그런 불가능한 욕망이 문학과 영화, 예술에 남는다. 영원히 늙지 않는 초상화 속 인물처럼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그런데 허구 속에서도 이뤄진 욕망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뤄진 꿈은 결국 괴물로 구체화된다. 죽음의 종말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의사의 꿈이 괴물과의 싸움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불가능했던 욕망은 실현과 거의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꿈을 판타지의 방식으로 서사화한다. 현실에 정의가 없다면 영화와 소설, 드라마에서 구현하고 현실에 진실이 없다면 그것 역시 서사로 재정립한다. 타고 남은 재가 불씨가 될 수는 없지만 시와 문학 속에서 가능하듯이 말이다. 최근 대중에게 다시 선보인 작품 <더 배트맨>(사진)이 그런 환상을 드러낸 작품 중 하나이다.

DC 코믹스 원작인 <더 배트맨>은 우리에게 익숙한 슈퍼 히어로와 다르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웅은 초월적 힘을 가진 슈퍼빌런과 싸운다. 그런데 가상도시 고담에 사는 배트맨은 법외 자경단으로 불린다. 그리고 그가 싸우는 대상은 유전자 변형 괴물이나 외계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범죄자다.

범죄 집단에 굴복한 무법천지 ‘고담’은 가상 도시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현실과 매우 닮아 있다. 초현실주의가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캐리커처로, 다만 더럽고 부패한 부분을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낸 일종의 볼록 거울인 셈이다. 볼록 거울 속 고담은 법과 치안이 무너진 공간이다. 공권력은 늘 범죄보다 늦고 심지어 범죄 집단과 이익을 나눈다. 이 모순을 자경단이 나서서 교정하고자 하지만 말 그대로 자경단은 법의 테두리 너머에 있다.

2022년 <더 배트맨>은 무너진 질서를 선거라는 합법적 과정을 통해 재건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선거가 한창인 그 시절, 범죄자 리들러는 선거조차 사실 범죄집단의 쇼에 불과하다며 더 강력한 파괴로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고 선동한다. 법과 공권력의 주체가 썩었으니 극단적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리들러는 사실상 연쇄 범죄인 수수께끼를 내며 고담시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커넥션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리들러의 방식은 잔혹하고 불법적이지만 그가 처단하는 대상들의 죄목 역시 만만치 않다. 리들러의 범죄가 말하는 것은 단 하나이다. 우리가 정의 실현의 주체라고 믿는 세력들, 언론·경찰·검찰·정치권 모두가 범죄 세력의 하수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 혹은 자기 나름의 정의를 지키려다 되레 범죄자와 손잡는 이야기는 이미 클리셰다. 뻔하고 진부하게 느껴진다. <더 킹>의 검사나 <내부자들>의 권력자들 곁에서 곤란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던 조직폭력배처럼 <더 배트맨>의 권력자들 곁에도 호시탐탐 그들의 약점을 파고드는 이익집단이 있다.

실제 만화가 발간되던 1940년대 <더 배트맨>에서 이익범죄집단이 마피아였다면, 21세기 들어 그 이익집단은 좀 더 세분화하고 다양해진 듯싶다. 문제는 표가 된다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면 그 속성을 막론하고 힘을 빌리고자 하는 정치권의 행태일 것이다. 1939년생 ‘배트맨’이 지금도 통한다면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권력의 속성 때문일 테다.

2022년의 배트맨은 상당히 초라하고 나약하다. 최첨단 장비를 갖춘 전사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책임감에 짓눌린 사립탐정의 모습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화려한 시각적 기술과 자본, 대단한 아이템으로 무장해 등장했던 20세기 영웅과 달리 2022년 배트맨은 도시의 치안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인다.

적을 찾아 우주까지 갔던 영웅들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바로 세상의 더러움이다. 우리 곁의 권력과 힘이 민주적 절차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만큼 부패하고 왜곡되어 있다는 안타까움의 반영, 그래서 영화를 통해서라도 교정하고자 하는 욕망. 어둠 속에 가려진, 범죄조직에 준하는 21세기의 마피아는 누구일까? 1940년, 2022년 어쩌면 세상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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