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사회는, ‘K절비’의 시대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출근을 위해 탄 광역버스는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무릎 위에 가방을 놓고, 그 위에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다. 유행이 지나고 조금 늦게 <지우학(지금 우리 학교는)>을 달리던 중이었다.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12화의 마지막, 정주행 완료를 10분 정도 남겨 두고 눈물이 터졌다. 사라진 이들을 위해 글귀와 간식을 놓아두는 곳에 양대수는 꼬깃꼬깃해진 빈 초코바 봉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준영아, 다음엔 한 박스 사다 줄게.”

눈물이 왈칵. 버스 안에서 눈물을 닦는 법. 마스크 때문에 김 서린 척 안경을 벗으며 쓱. 마스크가 있어 다행이었다.

<지우학>은 K좀비의 맥을 잇는다. 1968년 조지 로메로의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등장한 ‘원형 좀비’는 세월이 흐르며 상징으로 굳어졌지만 한국 영화 <부산행>과 <킹덤>을 거치면서 K스타일로의 혁명적 변화를 겪는다.

K좀비는 ‘겁나’ 빠르다. 미드 <워킹 데드>에서는 마체테(정글용 칼) 한 자루로 천천히 다가오는 좀비 여럿과 상대할 수 있었지만 <부산행>에서는 야구 방망이를 들었어도 일단 도망쳐야 한다. <킹덤>에서는 근접전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로 빨라져 화살이 주무기가 됐다. 서구 좀비들은 해가 지면 활동을 멈추지만 K좀비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전문 안무가의 손길이 더해진, 브레이킹 댄스 느낌이 나는 ‘각기 동작’과 함께 전력질주에 가까운 스피드는 K좀비의 새로운 특징이 됐다. 한국 사회의 저돌적·급진적 산업화의 바탕이 된 ‘빨리빨리’가 K좀비에 투영됐다는 해석이 더해졌다.

K좀비, 빨리빨리 투영돼 급속 진화

그런데 ‘지우학’에서는 새로운 K좀비 스타일이 탄생했다. 좀비도, 인간도 아닌 ‘절비’다. ‘절반 좀비’의 준말이다.

좀비 세계관에서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되는 게 원칙이다. 치명률 100%에 숙주가 필요없는 완벽한 공포가 지배한다. <지우학>에서는 이 세계관에 균열이 생겼다. 물렸는데, 좀비가 안 되는 ‘절비’의 탄생. 그 안에서 좀비의 세계관이 또다시 분화된다. 인간에 가까운 절비(남라)와 좀비에 가까운 절비(귀남)와 양쪽을 오가는 절비(은지).

세계관의 붕괴는 가치 판단의 복잡함을 만든다. ‘물렸다 and 좀비’에서 ‘물렸다 or 좀비’로 바뀐 세계관은 ‘물렸지만 좀비가 아닐 수 있는’ 이들과 이를 바라보는 ‘물리지 않은 이들’에게 존재론적 고민을 던진다. 나(너)는 좀비인가 아닌가.

고민의 지점에서 <지우학>은 ‘나는 좀비 또는 절비가 아니다’라는 증명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부여한다.

드라마 최악의 빌런 캐릭터 이나연은 한경수를 향해 “기생수(기초생활수급자) 새끼야”라고 외친다. 계급적 질문이 인간적 존재를 규정하고, 그래서 ‘좀비’여야 한다는 당위가 거칠게 옭아매는 서사적 충격. 한경수는 좀비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격리하고, 나연은 그 당위를 증명하기 위해 좀비의 피를 한경수에게 발라 감염시킴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

‘기생수’는 ‘좀비’여야 하는, 계급과 실존적 존재양식을 무참히 하나로 묶는 소름돋는 장면. 드라마는 후반부에 나연의 반성을 암시하면서 화해를 꾀하지만 ‘기생수=좀비’ 도식의 충격은 현실의 기시감과 함께 증폭돼 남는다.

2022년의 우리는 젠더와 계급과 진영의 갈라치기가 범람하는 아수라장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 (심지어 부산행 말고 용산행, 찬성이냐! 반대냐!) 소설 <소문의 벽>(이청준)에 나오는, 뒤에 가려진 사람을 구별할 수 없게 하는 ‘눈이 부시도록 밝은 전짓불’은 50년 뒤 온라인에서 더욱 확장돼 세상을 내리쬐고 있다. 세상은 복잡해졌고,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한쪽 편’으로 규정할 수 없다. 모두가 ‘절비’에 가까운 상황에서 ‘아임 낫 좀비’를 스스로 증명하도록 하는 현실의 강요는 공포에 가깝다.

세월 가도 기억함이 ‘낫 좀비’의 길

‘겁나 빠른’ K좀비에서, 세계적 양극화를 상징하는 K절비로 진화시킨 K드라마의 위대함. 그리고 ‘양자택일’의 감옥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중력 탈출 속도 초속 11.2㎞는 여전히 유효하다.

PS.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 재난의 피해는 불평등하게 작동한다. 그 피해를 잊지 않는 것. 미안함을 기억하는 것. 대수가 그랬듯 기억을 위해 빈 초코바 봉지를 버리지 않는 것이 ‘낫 좀비’를 향한 길이다. 8번째 4월16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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