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네트워크, 우정의 새로운 용법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이희경의 한뼘 양생] 돌봄 네트워크, 우정의 새로운 용법

‘노라’라는 별명의 공동체 회원이 있다.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주인공, 자아를 찾아서 집을 박차고 나간 노라를 떠올렸지만, 아니라고 했다. 노라는 ‘놀아라’의 준말이란다. 공부하는 공동체에서 대놓고 놀자고 선동하는 그녀는, 별명만큼 늘 활력 넘치고 유머가 풍부하며 순발력이 좋아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공동체 ‘인싸’이다. 그런데 그녀가 덜컥 암에 걸렸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임파선 전이가 진행된 삼중양성 침윤성 유방암 3기. 초기 진단한 의사는 “좋지 않다”고 했다. 아무리 암이 흔해진 세상이라지만 이건 날벼락이다. 대학병원 의사는 노라에게 선항암 6회, 이후 수술, 그다음 표적 항암 12회의 치료과정을 제시했다. 1년의 대장정이었다. 연로하신 부모님께는 비밀로 했다. 아이들은 엄마를 걱정하겠지만 자식은 원래 부모에게 무심하다. 이제 남편 하나 남았는데 그렇게 되면 독박 돌봄이다. 우리는 당장 노라 서포터즈를 구성했다.

선항암은, 예상대로 끔찍했다. 책에 쓰여 있는 대로 메스꺼움, 구토, 설사, 눈썹과 머리카락 탈모, 몸 여기저기의 극심한 통증 등 어느 것 하나도 그녀의 몸을 비켜간 것은 없었다. “몸의 구멍이라는 구멍은 콧구멍에서 똥구멍까지 다 헐어요”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한 말이다. 나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면 그만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극단적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서포터즈의 활동은 바로 그 선항암 18주 기간에 집중되었다. 서포터즈는 매일 아침 단톡방에서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한 그녀에게 지난밤은 얼마나 아팠는지 물어보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그녀의 마음을 토닥거렸다. 그리고 화요일마다 공동체의 다른 회원들이 만들어준 음식을 들고 꼬박꼬박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노라의 컨디션이 좋은 날은 함께 산책을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죽치고 앉아 수다를 떨었다.

숨는 대신 조건 없는 돌봄의 길로

우리만 그녀에게 간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우리에게 왔다. 3주 간격의 항암치료 동안 상대적으로 살 만해지는 3주차에는 꼭 공동체로 출근해서 세미나도 하고 회의도 했다. 우리는 그녀의 눈썹이 점점 빠지는 것을, 꽃 피는 봄이 와도 두꺼운 겨울 외투를 벗지 못하고 춥다며 벌벌 떠는 모습을, 손톱이 다 빠져 물건을 잘 집지 못하는 사태를 목격했다. 난 따뜻한 말을 건네기도 했고, 머리통이 잘생겼다고 농담하기도 했지만, 발등에 떨어진 일들을 처리하느라 눈인사만 하고 쌩하니 지나친 날도 많았다. 그래도 그녀가 공동체에 나온다는 사실, 그 하나가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얼마 전 우리는 그녀의 표준치료가 무사히 끝난 것을 기념하는 작은 파티를 열었다. 회원 한 명이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불렀다.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모두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회원 자녀의 돌잔치도 열어보고, 다른 회원의 스몰웨딩도 함께 치러봤지만, 친구의 항암 완수 파티를 열 줄은 몰랐다.

그다음 서포터스 한 명이 편지를 낭독했다. 노라가 가발을 사지 않고 아낀 돈, 다인실에 입원하면서 남긴 돈을 공동체 특별회비로 낸 일이 얼마나 신선했는지를 언급했다. 노라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서포터즈에게 오히려 환우 카페 유머까지 들려주며 웃게 만들었던 일도 떠올렸다. “지난 1년 돌이켜보니, 정말 놀랄 노라였어요. 존경합니다!” 마지막으로 노라의 차례. “이제, 우정에 대해 진심으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들과 평생을 함께 가겠구나, 라는 생각도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제가 받은 도움을 절대 잊지 못해요. 저도 나중에 누군가를 반드시 돕겠습니다.”

함께 돌봄은 우리에게 배움 일으켜

나도 어머니를 돌보고 있지만 독박 가족 돌봄은 지겹고 괴롭다. 그런데 가족을 넘어 우정의 네트워크 속에서 병든 친구의 돌봄을 함께 감당하기로 하자 타자를 돌보는 일은 우리에게 배움을 일으켰다. 상호의존의 현실을 더 깊이 깨닫게 했고, 돌봄 과정에서 벌어지는 불편한 감정을 성찰하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감정이 우리를 성숙시켰다. 친구가 암에 걸리는 불행으로 인해 우리는 돌봄이라는 우정의 새로운 용법을 발명해냈다. 이제 늙고 병드는 일이 속수무책으로 닥쳐오겠지만, 우리는 가족 안으로 숨는 대신 타자를 향한 조건 없는 돌봄의 증여 네트워크 속으로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나는 점점 더 그런 자신감이 생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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