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사제, 스웨덴과 한국의 길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글쎄요. 저는 구 경영진과는 단 한 번도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해본 적도, 인사조차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 회사 앞에서 수년을 출근 투쟁했지만 눈 한번 마주친 적 없는 분들이라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내놓고 ‘나는 네가 이래서 싫다. 너의 문제점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해주시면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설명이라도 했을 텐데 37년을 그런 자리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런 점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어느 날 퇴근길 라디오를 듣는데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1981년 ‘한국 1호 여성 용접공’으로 HJ중공업(구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했던 그는 1986년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부당한 부서 이동을 당했고 이에 반발해 무단결근을 했다가 해고됐다. 이후 37년간 그의 인생은 소송과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굽이굽이 힘들었을 그의 삶을 논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인터뷰를 들으며 한 장면이 떠올랐다.

2019년 겨울, 스테판 뢰뷔옌 당시 스웨덴 총리와 경제사절단이 방한했을 때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스웨덴의 재벌 격인 발렌베리 가문의 마르쿠스 발렌베리 스칸디나비아엔실다은행(SEB) 회장과 점심을 먹으며 ‘노동이사제’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스웨덴은 노동이사제를 실시한 지 올해로 50년이다. 발렌베리는 손 회장에게 제도의 장점을 열심히 설명했다. 노동자 대표가 이사회에 참석하면 경영상황을 투명하게 알게 되고, 서로를 존중하며 논의가 이뤄진다고 했다. 노동자 대표 역시 의사 결정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후 노동자들에게 회사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설득하는 역할을 해 결과적으로 경영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이가 발렌베리를 두고 “노동이사제 전도사”라고까지 했을 정도다.

어쩌면 스웨덴의 경험은 손경식 회장이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공공기관 노동이사제가 올 초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손 회장은 이에 대한 우려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표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싫으면 안 하면 될 일인데 재계가 노동이사제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노동이사제가 대세이기 때문이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경영 원칙으로 삼는 ESG 경영 즉 ‘환경·사회·투명 경영’은 이제 목표가 됐다. 세계 주식시장의 흐름을 선도하는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국가의 주요 연기금 운용사도 대상 기업의 ESG를 투자 지표로 삼는다. 노동이사제는 지배구조를 평가하는 대표 항목 중 하나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비롯해 주요 기업 대표가 앞다투어 ESG 경영을 선포하고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 대선 TV토론 중 노동이사제에 대한 각 후보의 입장이 무척 흥미로웠다. 한 후보는 손경식 회장의 의견을, 또 다른 후보는 발렌베리의 의견을 그대로 말했기 때문이다. “노동이사가 이사회 임원으로 직접 들어오게 되면, 한 사람밖에 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끝까지 고집을 피우고 반대하면 결국 전체 이사회에서 통과시킬 수가 없다”며 노동이사제를 반대하는 안철수 후보, 이에 맞선 윤석열 당선인은 “우리나라 이사회가 결국 기업 오너의 뜻을 따라주다 보니 그런 것”이라며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는 기업이 투명하게 운영되게 하자는 것”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다”라고 했다.

누구 말이 맞을까? 일단 발렌베리의 말은 맞다. 사장이든 인턴이든 서로를 직책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고, 일과 시간에 전 사원이 커피를 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피카’문화가 있는 스웨덴에서는 말이다. 노동조합 대변인 출신으로 총리가 된 스테판 뢰뷔옌과 100년이 넘도록 스웨덴 재계를 대표하는 발렌베리 가문의 대표가 총리와 경제사절단 일원으로 다니는 나라라면 노동이사제가 없어도 노동자 대표는 이사진에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37년간 복직투쟁을 하던, 아마 대한민국 노동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사람과도 눈 한번 마주치지 않은 경영진이 다수인 이사회라면 노동이사제가 두려울 뿐 아니라 용납할 수 없는 제도일 것이다.

올 7월부터 시작되는 공공기관 노동이사제가 우려를 씻어주길 바란다. 노동조합이 할 일이 많다. 이제 14.2%인 조직률을 끌어올려 대표성을 강화하고, 조합원만의 권익 주창을 넘어 노동계 전체와 연대해야 한다. 안건에 반대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회사를 키우고 상생하기 위한 제안을 하려면 역량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사장님들은 노동자와 눈을 맞추고 대화하는 연습부터 하자. 거기부터가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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