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공간’, 어떻게 국민의 ‘장소’로 만들 것인가

도재기 논설위원

청와대 정문이 74년 만에 활짝 열렸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에 맞춰서다. 새 정부 출범을 알리는 데 청와대 개방만큼 좋은 소재도 드물다. 취임식장에 개방 행사가 생중계된 이유다. 개방 첫날 2만6000명이 찾았다. 반응도 좋다. 윤 대통령은 일단 약속의 하나는 지켰다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을 둘러싼 논란도 묻히는 듯하다. 그렇다고 여론 수렴도 없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식’이라는 지적, 제왕적 대통령을 탈피하겠다며 보인 제왕적 행태에 대한 비판이 가실 수는 없다.

도재기 논설위원

도재기 논설위원

어쨌든 ‘권력의 공간’ 청와대가 ‘시민의 공간’이 됐다. 이제 숭례문에서 광화문 광장~광화문~경복궁~청와대를 거쳐 북악산(백악산)까지 한 걸음에 즐길 수 있다. 역대 최고 권력자들의 집무실·관저를, 여러 문화유산과 울창한 숲, 잘 가꿔진 정원을 관람한다. 역사문화 탐방이든, ‘시크릿 가든’을 보는 호기심에서든, 등산·산책이든 가장 유명하지만 닫혔던 공간을 자유롭게 거니는 것이다.

청와대 개방으로 새 정부는 큰 정치적 효과를 거뒀다. 하지만 청와대의 활용이라는 무거운 과제도 떠안았다. 지금의 개방은 물리적 공간을 연 절반의 개방일 뿐이다. 청와대 공간이 이미 품고 있는 역사와 문화·정치·자연환경·도시지리적 자산을 더 꽃피울 때가 진정한 개방이다. 유물의 출토보다 보존·관리와 연구, 전시·교육 등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청와대와 그 일대는 무한한 활용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정부 수립 이후 74년 동안 대통령들이 머물며 한국 현대사, 정치사를 엮어낸 상징적인 곳이다. 역사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현장이다. 1000여년 전 고려시대에는 남경의 이궁이 있었다. 경복궁 근정전 뒤편과 청와대 사이의 흥복전·함화당 영역에서는 고려시대 유물·유구가 확인됐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뒤뜰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총독, 해방 직후에는 미군정 사령관의 관저가 자리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청와대 일대에는 문화유산·유적이 61건이나 있다. 주변에는 미술관과 갤러리, 박물관들이 자리하고 서촌, 북촌과도 연계돼 문화예술이 살아숨쉰다.

제대로 된 의미의 발견, 가치 부여를 통한 활용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다양한 제안들도 이미 나와 있다. 경복궁의 복원과 맞물려 문화유산으로서의 활용, 도서관·미술관·박물관·공연장·한류 복합문화공간도 거론된다. 아예 손대지 말라는 요구도 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집무실·독립선언 발표 장소를 현대 전시공간 등으로 묶어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한 필라델피아의 ‘독립역사공원’(INHP) 등 해외 사례도 있다.

새 정부는 아직 마스터플랜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110대 국정과제’에서 ‘훼손된 경복궁 후원의 역사성을 회복하여 세계적인 역사문화공간으로 조성’ ‘핵심유적 발굴 및 복원(2023~2026년)’이라고 밝혔다. 향후 어떻게 활용될지는 미지수다. 다만 분명한 것은 활용방안 마련에 국민들의 참여가 필수적이어야 한다. 집무실의 이전처럼 불통의 밀어붙이기 행태가 재발해서는 안 된다. 임기에 연연하지 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충분하게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모두가 공감하는 활용이어야 한다. 특별한 곳인 만큼 특별한 책임감, 신중함이 필요하다. “이러려고 수천억원의 세금을 쓰며 청와대를 나갔나”는 소리를 듣지 않고, ‘주술적 이유’라는 의혹 불식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대통령실과 문화재청·문화체육관광부·서울시 등 관계기관의 긴밀한 협의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흔히 공간과 장소를 같은 의미로 혼용한다. 저명한 지리학자인 이푸 투안은 명저 ‘공간과 장소’에서 이를 구분한 것으로 유명하다. 공간은 자유·개방성·모험 등을 상징하고 추상적이고 미완성이어서 풍부한 가능성을 가진 곳이다. 장소는 안전·안정·안식처를 상징하며 일상적·실제적 행위가 발생하는 구체적인 곳이다. 공간에 각자의 경험·삶·감정이 녹아들 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공간은 장소가 된다. 그의 견해를 빌리면, 지금의 청와대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특별하고도 국민 모두의 ‘장소’로 만들 책임과 의무가 새 정부에 있다. 그냥 앉아 쉬기에 알맞은 장소도 좋다. 대통령과 개인의 삶, 유구한 역사와 정치권력, 민주주의, 더 나은 세상 만들기 같은 묵직한 생각이 끝없이 솟아나는 화수분 같은 장소도 괜찮다. 개방된 청와대 공간의 장소화는 새 정부의 능력을 시험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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