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 목사·시인
[임의진의 시골편지] 갑오징어 먹물

갑오징어 철이다. 인생 갑질 하는 재미야 모른다만 갑오징어 나올 때면 살짝 데쳐 초장이나 참기름장에 찍어 먹는 순간 일약 미식가 갑으로 등극. 오독오독 씹힐 때 어금니에 닿는 고소한 풍미는 둘이 먹다가 귀신이 죽어도 몰라. 갑오징어를 먹는 순간 내 팔자도 을에서 갑이 되어보누나. 여기에다 갑오징어는 까무잡잡 먹물이 찐득하고 꾸덕해. 이 먹물에다 소면을 삶아 비벼 먹어도 좋고, 오징어살을 찍어 먹어도 맛나.

어딜 가나 먹물들의 싹쓸이 판이렷다. 배운 놈들이 외려 수를 짜고 세를 보태 배나 지독하게 결속한다. 정말 악착같이 덤비고 물어 뜯으니 이생에서 잘들 먹고 산다. 그러니까 죄다 먹물이 돼보려고 발악 피똥을 싸는 거지. 부정한 방법으로라도 학벌을 만들고, 학위를 자랑하고, 학연으로들 결탁한다. 갑오징어가 뿜는 먹물은 먹기라도 할 수 있지만 갑질 인간들이 뿜어내는 먹물은 피비린내가 진동해. 그들이 차지한 고위직에서 천지사방으로 뿌려대는 먹물은 한 치 앞을 분간 못하도록 세상을 어둡게 만든다. 먹물이 고이고 쌓인 곳은 늪지대. 자칫 발이라도 담갔다간 영혼까지 쏙 집어삼키고 달랑 뼈다귀만 토해내고 말리라.

일하는 사람들은 쉴 곳이 마땅치 않아서 ‘잠만 자는 방’을 얻어 살기도 한다. 싱크대도 없고 화장실도 없지. 달랑 침대 하나 놓고, 잠만 자고 나오는 방. 요란하고 시끄러운 굴다리 아래서 눈을 뜬다. 밝은 아침 해도 왠지 서러워. 세상에 뿌려진 먹물을 치우고 쓸고 닦고 하다보면 하루가 금세 흐르지. 먹물들이 좋다고 소리치는 건배사에 기가 죽어 술집 귀퉁이에서 고졸 친구랑 소주병을 비운다. 일당으로 갑오징어 한 접시. 보증금 기백에 월 몇십, 셋방살이 쪽잠이 기다리지만 이 밤만큼은 인생의 갑이 되어보는 순간이다. 학교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전전할 때, 사장실에 걸려있던 학위증과 박사모는 상습 임금체불과 무관하지 않았다. 못 받았던 돈으로 갑오징어는 넉넉히 사먹을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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