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비판의 맥락을 들여다봐야 할 이유

소응천이라는, 삼남(三南)에서 이름을 떨쳤던 선비에게는 첩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나타나 그에게 자신을 첩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한 뒤 같이 살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어느 양반집의 종이었는데, 아홉 살이 되었을 때 그 집이 권세가에 의해 멸문을 당했다. 가족 중 아가씨와 자신만이 겨우 목숨을 건진 뒤 검술을 배워 원수를 갚기로 맹세한다. 이 어린 소녀들은 남장을 하고 헤매다가 겨우 자신들을 가르쳐줄 검객을 찾았고, 열일곱이 되자 검술은 물론 공중을 날아다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녀들은 도시를 다니며 검술공연으로 돈을 벌어 무기를 사고 원수의 집안을 찾아내어 모두 죽인 뒤 멸문시킨다.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복수가 끝난 뒤 아가씨는 그녀에게 뛰어난 남자를 찾아 결혼해서 잘 살라고 말한다. 자신은 남자가 아니므로 집안을 이을 수도 없고, 검술의 대가가 된 지금 어떤 사람도 마음에 차지 않아 결혼할 수도 없으니 자신에게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가씨는 그녀에게 “너 역시 기이한 포부와 걸출한 기상이 있는데 어찌 평범한 남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고분고분 살겠느냐?”라고 말한 뒤 칼에 엎드려 죽는다. 그녀는 유언대로 뛰어난 남자를 찾기 위해 남장을 하고 3년을 떠돈다. 그러다 그녀는 소응천의 첩이 된 것이다.

갑자기 그녀가 과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가 걸출한 인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응천이 잘하는 것이라고는 고작 문장의 잔재주와 역술·사주·점·부적·도참 등의 잡술뿐이고 도덕적으로 수양하고 세상을 다스려 모범이 되는 높은 도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괜히 산속에 은거하며 뛰어난 척하지 말고 적당하고 평범하게 전주 같은 도회지에 나가 향리들의 자식들이나 가르치며 괜히 헛된 꿈을 갖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그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검무를 보여주는데, 소응천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벌벌 떨며 쓰러져 기절한다.

이는 삽교 안석경의 <검녀(劍女)>라는 소설의 내용이다. 안석경은 계급적으로 하위에 있는, 그러나 지적·신체적 능력에서 뛰어난 검녀와 양반이자 당대 유명한 선비로 일컬어졌으나 실상은 소인배인 소응천을 대비시킴으로써 양반의 위선을 비판한다. 지방 양반이 능력도 안 되면서 뛰어난 선비라는 이름을 얻어 행세하다가 실제 모습이 폭로되는 과정을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사회비판적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진보적인 여성관을 보여준다고만 생각할 수 없는 또 다른 배경이 존재한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검녀>는 노론계 인사인 안석경의 소론에 대한 편견이 반영된 작품이다. 안석경의 문집에는 소론계 인사들에 대한 비판적인 글들이 상당히 있는데, 그의 비판 방식은 아내의 입을 빌리는 것이다. 그가 쓴 ‘박효랑전’이라는 열녀전에는 <검녀>와 유사한, 남편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가 버리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검녀>에 등장하는 소응천 역시 안석경과 동시대를 살았던 소론계 인물이다. 그는 지리산과 덕유산 등에서 일생을 보냈던 인물로, 젊은 시절 잡학과 사장(詞章)에 관심을 두었으나 소론 선배들의 권유로 학문에 몰두하여 도학자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노론계 내에서 소응천은 ‘잡술’과 ‘글재주’나 부릴 줄 아는 소론 소인배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만약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안석경은 검녀라는 장치를 통해 그에게 포부를 갖지 말고 향리들이나 가르치며 살라고 조롱하면서 그 이미지를 극대화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생긴다. <검녀>는 잘 구성된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즐기기만 할 수 없는 이유는, 소설 안에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이라는 배경이 만들어내는 심연, 그리고 검녀라는 멋진 여성을 그려내면서도 그녀를 반대 당파를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이 소설의 양면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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