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흘러나오는 음악

신예슬 음악평론가

오랜만에 비행기를 탔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만 착륙 후엔 기내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확인했다. 기다림의 시간을 채워준 음악은 클로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이었고, 연달아 비슷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다른 비행기에서 냇 킹 콜의 ‘Unforgettable’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 문화 속에서 이들이 어떤 기호로 통용되는지 분명히 알고 선곡해 놓은 듯한 이 음악들은 도착지에 대한 설렘 혹은 떠나온 여행지에 대한 기호화된 그리움 같은 것들을 내 인식에 필터처럼 끼워 넣었다. 딱히 그 장소들을 그렇게 떠올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신예슬 음악평론가

이런 제목의 유튜브 플레이리스트가 있었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 곧 이륙하겠습니다’ ‘밤 비행기’ ‘우리 목적지는 뉴욕입니다’ 등. 여행, 카페에서의 시간, 산책길, 드라이빙 등 수많은 상황을 음악적으로 연출하는 유튜브 플레이리스트 속에서 비행기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플레이리스트는 듣는 자의 환경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설정하고, 그 순간을 최대치로 낭만화한다. 이건 마치 음악을 재료로 한 일종의 세계관 놀이와도 같아서, 음악적 환상으로 현실을 근사하게 왜곡하는 이중창을 설계한다.

이런 문화가 생긴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현실 속 배경음악이 해오던 일들을 이 플레이리스트의 입장으로 되짚게 된다. 나는 플레이리스트를 음악적 경험과 삶에 대한 기대가 맞물리는 장소라고 이해한다.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망상 가득한 음악 경험을 하는 일도 어느 정도 좋아한다. 다만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은 이런 낭만화된 세계관으로서의 음악 경험이 현실과 맞닿는 것 같을 때다. 얼마 전 도심 속의 큰 공원에서 ‘도심 속 공원에서 듣는 한적한 음악’ 같은 음악들, 산속의 산책길에서 ‘자락길에서 듣는 경쾌한 재즈’ 같은 음악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환상이 필요없는 곳에 기호화된 환상을 욱여넣는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인지, 이 음악이 있는 게 없는 것보다 더 좋다고 확신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듣는 사람에게 오늘날의 음악 감상 환경은 놀이공원 같은 환상의 세계와 다름없다.” 김호경의 책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에서는 이런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음악은 적재적소에, 내 마음과 꼭 맞는 상황과 맞물렸을 때 굉장한 시너지를 내고 기분 좋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 곳곳에 세계관 놀이 플레이리스트처럼 꼼꼼히 들어차있는 배경음악들은 현실감각을 서서히 무디게 만든다. 물론 그런 경험도 즐거울 때야 있지만 내 눈과 귀를 가로막을 정도로 현실에 앞서 조건처럼 자리하는 환상들은 나를 현실에서 종종 탈락시키는 것만 같다. 눈앞에 보이진 않지만 우리의 청각계에 그런 환상의 세계가 끝없이 펼쳐지고 거기서 자의로 나갈 수 없다면, 그건 아마 영원히 멈추지 않는 놀이공원처럼 조금 오싹할지 모른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 내가 인지하는 현실을 더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거나, 더 근사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 음악이 개입하는 순간 내가 바라보는 세계는 즉각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조금 뒤틀린다. 이런 음악의 힘은 꽤 유용하지만, 아무래도 세계에는 너무 많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특히 공공의 영역에서 들려오는 특정 음악들은 어떤 환상이 공인되어버리는 것 같은 데다 듣지 않을 선택권이 없다는 점에서 날 낙담케 한다. 음악은 삶의 여러 순간에 자연스레 침투해있고 그 영향권은 확실히 점점 넓어지고 있다. 그런 만큼 음악이 우리의 현실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조금 더 섬세히 고려할 필요를 느낀다. 너무 곳곳에 만연한 음악은 현실뿐 아니라 음악을 인지하는 감각도 얼마간 무디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래도 음악과 현실 양쪽 모두에 문제적일 것이다. 세계를 똑똑히 지켜보며 침묵을 견디는 법을 더 배워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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