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 시인
[詩想과 세상] 타인의 것

그가 도장을 찍는다. 나는 사인을 한다. 가볍고 밋밋한 종이 서너 장에 이백 평 남짓의 땅이 널브러져 있다. 그 땅 위를 넘나들던 태양과 비와 구름과 그곳에서 자라던 이름 모를 작은 나무 몇몇과 그 나뭇가지 사이를 좋아라 날아다니던 새들과 발자국 없이 막무가내 기어오르던 온갖 벌레와 주변의 잡초들이 생애 처음으로 저녁을 맞는다. 내게 본적을 두고 뿌리내리던 모든 것들이 선택의 여지 없이 다른 이에게 팔려 간다. 사람과 사람 높이만큼 오르내리던 말과 삐뚤거리는 글씨와 먹구름으로 도장을 찍고 달빛 사인하는 것으로 타인의 것이 된다. 신의 옆구리를 훔쳐 내 것이라 명명해 왔던 것들이 바퀴 없이 타인에게 천천히 굴러간다. 입과 눈과 귀가 틀어막힌 채 은빛 거미줄마저 고스란히

아무도 모르게 그려 넣었던 오로라는
절대 매매할 수 없는 나만의 것

흘리지 않게 집으로 가져와 장롱 속에 감춘다

이향란(1962~)

땅을 소유한다는 건 그 땅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다. 내 땅에 집을 짓거나 농사를 지으며 권리를 행사한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소유하고 있던 “이백 평 남짓의 땅”은 타인의 손에 넘어간다. “이름 모를 작은 나무”들과 그 나무를 “기어오르던 온갖 벌레와 주변의 잡초들”도 덩달아 넘어간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타인에게 넘어가는 게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우리가 “입과 눈과 귀를 틀어막”고 있으면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난다.

땅의 소유는 지상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늘과 지하도 포함된다. 비행기가 타국 영공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도 햇빛이나 비와 구름, 나뭇가지를 넘나드는 새와 나비까지 간섭할 수는 없다. 인간이 그어놓은 땅의 경계는 인간에게만 해당된다. 애초에 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 땅의 주인은 그곳에 사는 생물들이다. 인간만이 “나만의 것”을 주장한다. 하긴 마음에 ‘오로라’를 간직한들 그게 무에 문제가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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