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의 향립약조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이황은 56세 되던 1556년에 ‘향립약조(鄕立約條)’를 지었다. 이것이 후일 ‘예안 향약’으로 불리는 예안 지역의 향약(鄕約)이다. 예안은 오늘날 안동시 예안면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안동과 별개의 행정단위인 예안현이었다. 이황은 10여년 전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고향 예안에 돌아와서 저술에 매진했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향약’은 흔히 계급적 관점에서 이해된다. 양반들이 자신들 삶의 공간에서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가능한 해석이고, 그런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향립약조’의 내용은 이런 맥락과 많이 다르고 오히려 정반대이다.

알려져 있듯이 향약의 대표적 내용은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규제하고, 예의로 서로 사귀고, 어려운 일에 서로 돕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향립약조’는 이 중, 오직 과실상규에 대한 내용으로만 채워졌다. ‘과실상규’는 향약 내용 중, 규제와 처벌의 성격이 가장 강한 규정이다. 얼핏, 향약에 대한 계급적 인식에 부합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향립약조’ 총 33개 조항에서 29개가 ‘선비’ 즉 양반들에 대한 내용이다. 향립약조는 평민들이 아닌 지배층인 ‘선비’들에 대한 규제를 담고 있다.

이황이 향립약조에서 규제한 행동 유형 몇 가지를 들어보자. “망령되이 위세를 부려 관청을 소란스럽게 하고 마음대로 하는 자”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사풍(士風)을 더럽힌 자”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며 사납게 행동하여 싸움을 일으키는 자” “염치없이 막 되먹은 자들과 붕당을 만들어 난폭한 짓을 많이 하는 자” “헛된 말을 조작하여 남을 죄에 빠뜨리는 자” “관청의 임명을 받고 공무를 빙자하여 폐단을 일으키는 자”들이 그들이다.

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평민들은 이런 행동을 하기 어렵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장삼이사들은 법을 지키지 않을 도리가 없다. 법을 어기면 즉각적인 처벌을 피하기 어렵고, 처벌을 받으면 양심은 둘째치고라도 생업을 위협받는다. 불법을 저지르면 크든 작든 자기 생활이 어그러지고 만다. 불법적 행동을 쉽게 자행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을 ‘자잘한’ 법 따위에 규제되지 않는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향립약조에서 콕 집어 강조하는 것은 세금을 피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많은 인호(人戶)를 예속시켜 놓고 관역(官役)에 응하지 않는 자” “조부(租賦)에 힘쓰지 않고 요역을 면하길 도모하는 자”를 이황은 비판했다. 조선 시대에는 고을 단위로 부과되는 세금이 많았다. 위 내용은 고을 안에서 공평하게 내야 할 세금을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하고 자신은 빠져나가는 행위를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이황은 자기 사는 마을에 부과된 세금 중 자기 집 몫을 누구보다 먼저 성실하게 납부했다.

2차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 중에서 한국이 가장 뛰어난 경제적·정치적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에 오늘날 이견이 없다. 그 원인의 하나로 학자들이 널리 인정하는 것이 ‘농지개혁’이다. 농지개혁이 기득권층인 전통적 지주층을 없앴던 것이 한국의 발전에 큰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 제거가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발전에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1392년 건국된 조선은 15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기득권층이 성립되기 시작한다. 이 흐름은 16세기 중반이면 이황이 살던 예안까지 확산된다. 이황은 기득권세력을 없애지는 못해도 그것이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극소화하려 했다. 기득권층의 자기 규제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소망이 이뤄지지는 못했다. 이황의 제자들은 스승을 지극히 공경했지만, 향립약조는 이황의 제자들이기도 했던 예안 양반들 저항에 막혀 실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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