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담는 ‘컵’에 대한 헌사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접시는 음식을 담기에 평평하지만, 컵은 음료를 따라야 하기에 움푹 패어 있다. ‘컵’ 안은 비어 있다. 비워진 만큼 담을 수 있다. 음식을 섭취하면서는 고개를 접시 쪽으로 수그린다. 음료를 마시면서는 컵을 입 쪽으로 기울인다. 음식은 숭배하면서 먹고, 음료는 맞이하듯 마신다. 평소에 음식을 귀하게 여기지만, 목이 마를 때야말로 더 간절한 마음으로 음료를 갈구한다. 컵은 그런 존재다.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지금은 ‘컵’이라고 부르지만, 예전에는 다르게 불렸다. 사발이기도 했고, 잔이기도 했으며, ‘고뿌’였다가 컵이 되었다. 명칭이 바뀌면서, 마시는 음료의 내용물도 조금씩 변했다. 사발에는 식수를 담았고, 잔에는 술을 따랐다. 일제강점기에는 맥주와 위스키를 ‘고뿌’에 따랐다. 지금은 커피와 같은 기호품이 컵에 더 많이 담긴다. 가정에는 세척해서 사용하는 컵이 있지만, 집 바깥으로 나오면 일회용컵 사용이 일상화되었다. 생명을 유지하는 음료를 담는 컵이 일회용으로 바뀌었다. 일회용컵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테이크아웃 음료를 마시는 일이 불편해질 것이다. 접촉감염을 우려하는 의료기관에서도 곤란을 겪을 수 있다. 야외활동을 할 때도 일회용컵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일회용컵이 사라지면, ‘불편’은 증가하겠지만, ‘마시는 행위’까지 불가능해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요구해서 일회용컵이 꼭 필요한 물품이 된 것은 아니다. 일회용컵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다보니, 필요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인간의 욕구가 기술을 낳기도 하지만, 기술이 인간의 욕구에 의존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일회용컵의 대표 격인 종이컵이 국산화된 시기가 1980년 1월10일이었다. 현진제업이 삼성전자와 한국개발리스의 지원을 받아 ‘자판기용 종이컵 국산화’에서 성공했다. 국산화라고는 하지만 독일에서 ‘자동 컵 제조기’를 들여와 만들었다. 현진제업이 종이컵 성형기 자체 개발에 성공한 때가 1986년이니, 그때부터 종이컵 생산이 온전하게 국산화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 이면에는 음료자판기의 보급이 자리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1978년 6월 ‘자동판매기 사업본부’를 신설해 개발에 뛰어들었다. 삼성전자의 자판기 사업이 현진제업의 ‘종이컵 자체 개발’로 이어진 셈이다. 1980년 즈음 한국에는 4000여대의 음료 자판기가 있었다. 월평균 2000만개의 종이컵이 소비되었다. 음료 자판기의 일회용컵이 지금은 프랜차이즈 카페의 수요로 변했다. 2018년 기준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사용되는 일회용컵이 연간 25억~28억개라고 한다.

6월10일에 시행 예정이었던 ‘일회용컵 보증금제’가 12월1일까지 유예되었다. ‘일회용컵 보증금제도’가 시행되었다면, 스타벅스와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와 롯데리아 같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회용컵을 이용하려면 300원을 더 내야 했다. 대신, 빈 컵을 반납하면 300원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불편한 제도’이겠지만, 쓰레기를 줄이고 자원을 재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이다. 시민사회에서도 제도 시행에 대한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지구 생태환경에 대한 감수성이 예전보다 예민해졌고, 기후환경 변화에 대한 위기감도 고조되었다. 문제는 환경윤리의 실천이 경제적 이유와 일상의 불편 때문에 뒤로 밀리곤 한다는 데 있다. 일상의 보수적 관성은 힘이 세다. 그래서 점진적인 변화에서 희망을 보게 된다.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환경부가 정책 추진 과정에서 저지른 실수다. ‘일회용컵 보증금제도’는 코로나19가 확산되던 2020년 6월 ‘자원재활용법’이 개정되면서 준비되었던 제도였다. 2년여의 준비기간이 있었음에도, 환경부는 공공무인반납기 확대, 프랜차이즈 본사에의 책임 부과 등의 준비가 미흡했다. 제도 시행 준비 과정에서 프랜차이즈 본사와의 정책 협의는 이뤄졌지만, 소상공인인 현장의 가맹점주와의 만남은 소극적이었던 것도 문제였다.

약자인 가맹점주에게 경제적 부담을 늘리는 방식으로 환경정책이 시행되면, ‘더 큰 미래 환경정책의 실패’를 불러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유예를 환영해야 할 형편이다. 정책적 측면에서도 일회용컵 재활용에 초점이 맞춰지기보다는, 다회용컵 사용을 권장하는 제도 보완을 통해 쓰레기 자체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이번 환경부의 정책적 후퇴가 시민사회 내에서 더 큰 환경 문제 재인식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컵이 물을 담는 일회용 쓰레기여서는 안 된다. 컵은 모든 생명이 함께 쓰는 물을 담는 ‘지구의 작은 그릇’이기 때문이다. 온 생명은 물로 연결되어 있다. 컵이 함부로 버려지면, 물은 더 심하게 오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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