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받아 마땅한 환자는 없다

만 12세 여자 아이들에게 일명 ‘자궁경부암 백신’이라고 알려져 있는 인간유두종바이러스예방주사를 무료로 접종하는 ‘건강여성 첫걸음 클리닉’ 사업에 2016년부터 참여해 오고 있다. 이 사업에는 무료 예방주사만이 아니라 성적인 발달 상태를 체크하고 생식건강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을 진행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데, 2015년 교육부에서 발표한 ‘학교 성교육 표준안’에 피임과 관련한 구체적인 교육내용이 모조리 빠졌다는 것에 분개하던 나는, 그렇다면 내가 만나는 친구들에게라도 필요한 내용을 전달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재택의료센터 가정의학과 전문의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재택의료센터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인간유두종바이러스는 사마귀 바이러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 사마귀 바이러스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어떤 건 피부 사마귀를 만들고, 어떤 건 자궁경부암, 항문암, 구강암 같은 암을 일으키지. 바이러스가 암을 일으킨다는 게 좀 이상하지? 하지만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암은 많아. 간암도 간염 바이러스가 일으키거든. B형 간염 예방주사를 맞는 것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 이 바이러스는 주로 성관계를 통해서 옮겨지는데, 남자-여자, 남자-남자, 여자-여자 사이의 성관계에서 모두 옮을 수 있어. 물론 여자-여자 사이의 성관계에서는 옮는 위험은 크지 않아. 그러니까 사실 남자 아이들도 다 같이 주사를 맞는 게 좋은데, 지금은 나라 예산이 많지 않으니까, 이 바이러스가 일으킬 수 있는 제일 무서운 질환인 자궁경부암부터라도 예방하자는 생각에 우선은 여자 아이들이라도 맞고 있는 거야. 호주에서는 여자 아이들, 남자 아이들 모두 맞고 있어.

예방주사로 예방할 수 있는 자궁경부암이 전체 자궁경부암의 70%쯤 되니까, 예방효과가 아주 낮은 건 아니지만 100% 다 예방하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혹시 애인이 생겨서 성관계를 하게 되면 꼭 콘돔을 끼는 게 좋아. 콘돔은 임신을 막는 데도 필요하지만, 암을 예방하는 데도 중요하거든. 콘돔 사용법을 모르면 나중에 알려줄게.”(실제 진료실에서 콘돔을 잘 끼는 법을 청소년들에게 교육하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교육의 내용. 주사를 맞으러 온 아이들은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함께 온 보호자를 쳐다보곤 한다. 가끔 “얘는 아직 그런 걸 잘 몰라요”라고 하는 보호자도 있다. 네, 모를수록 해야지요. 안전한 성관계에 대한 교육은 너무 중요하니까요.

나의 레즈비언 친구 한 명은 대학 때 자궁경부암 예방주사를 맞았다. 과에서 단체 접종을 하던 중이었다는데 “자궁경부암 주사는 처녀가 아니면 별 효과가 없으니, 안 맞는 애들은 처녀가 아닌 거다”라는 괴소문이 돌면서, 과의 여학생들이 빠짐없이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남들이 자기를 ‘처녀’로 보지 않을까 두려워서 공개적으로 주사 맞는 분위기가 되는 바람에, 레즈비언인 자신은 자궁경부암에 걸릴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걸 알면서도, 친구는 동성애자인 자신의 성적 지향이 들킬까 걱정되어 큰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자궁경부암은 바이러스에 의해 생기는 암이므로, 그 바이러스가 어떤 경로를 통해 옮기든, 실상은 바이러스에 기본 면역이 약한 사람들이 걸리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예방에 대한 강조, 안전한 성관계에 대한 교육이 환자를 향한 비난으로 돌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자궁경부암에 걸린 여성에게 “그러게, 왜 결혼을 해서 남자와 성관계를 하고 그래?”라거나 “왜 굳이 아이를 자연분만으로 낳아서 자궁경부암의 위험성을 높이고 그래?”라고 하지 않는다. 임신과 자연분만이 자궁경부암에 걸릴 위험성을 높이는 조건인데도 말이다 .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특정한 질환과 연결시켜 비난하는 것은, 사실 비난하고 싶으니까 비난하는 것이지, 근거는 없다. 병에 걸리고 싶어 걸리는 사람은 없다. 비난받아 마땅한 환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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