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반기억의 역사, 그리고 ‘황사영백서’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조선이 남긴 방대한 국가 기록 중 특히 역모와 같은 중죄인들을 심문한 기록인 <추안급국안>에는 흥미로운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1801년 신유사옥의 기록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황사영백서>이다. <황사영백서>는 신유사옥 당시 황사영이라는 27세의 천주교인이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로, 당대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서, 유럽의 전함을 불러들여 조선의 문호를 열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게 해야 하며,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등 반국가적인 언술로 채워져 있는 글이라고 알려져 있다.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국가와 정치가 종교에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글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황사영백서>의 전부일까? <황사영백서>의 특징을 반국가적 요소로 성급하게 규정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이 북경 주교에게 청탁하는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다 보니 자주 망각하게 되는 것은 황사영이 서신의 대부분을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으로 채우고 있다는 점이다.

황사영이 충북 제천의 배론성지에 숨어서 비단을 얻어 이 편지를 썼을 때, 그는 신유사옥이라는 국가 폭력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국가에 의해 자신이 헌신한 공동체가 역적의 조직으로 규정되고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황사영은 1780년대부터 1801년까지 조선에 존재했던 믿음의 공동체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절박한 바람을 가졌을 것이다. <황사영백서>에는 신유사옥으로 죽어간 한 명 한 명의 삶과 신앙이 별처럼 빛나게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는 친척과 친구도 있고, 같은 공동체에 속하지만 이름만 들어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기억에 의존해 그들의 삶을 기록 속에 되살리고자 했다.

<추안급국안>에는 천주교인들을 역적으로 규정하는 국가의 공식기록과 황사영의 저항의 기록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정부의 기록자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배치로 인해 이 기록은 마치 정부에 의해 중죄인으로 규정된 천주교인들에 대한 황사영의 변호처럼 읽힌다. ‘역적’ 황사영이 남긴 기록은 정부의 기록 안에 포함되었고, 국가, 노론, 남인들 중 천주교를 배척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통되었다. 즉, <황사영백서>가 살아남은 이유는 천주교인들 때문이 아니라 천주교를 배척하는 척사파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천주교인들은 <황사영백서>에 접근하지 못했던 데 반해 척사파들은 그 내용을 입수할 수 있었고, 천주교의 반국가성을 강조하기 위해 척사서에 포함시켰던 것이 역설적으로 이 글을 살아남게 만든 것이다.

천주교인들이 <황사영백서>를 읽게 된 것 역시 척사서를 통해서였다. 1859년 앙투안 다블뤼 주교는 척사서를 보던 중 이 글을 발견하고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황사영이 남긴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비망기>,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인용되었다. <한국천주교회사>는 출판된 이후 다양한 유럽어뿐 아니라 일본어로 번역되었으며, 황사영이 비판했던 조선의 현실적 문제도 번역에 포함되어 유통되었다. 천주교인들의 고통, <황사영백서>로 대표되는 그들의 분노 역시 번역되었다.

신유사옥 당시 정순 왕후를 포함한 위정자들은 천주교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위협을 느꼈고, 천주교의 몇몇 교리들이 조선의 규범과 질서, 그리고 문화에 충돌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당시 정부의 입장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 것은 사회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국가의 기록은 ‘공식 기억’을 만듦으로써 사람들이 사건을 망각하고 역사를 흘려보내게 한다. 그러나 신유사옥에 대한 기록에 <황사영백서>가 포함됨으로써 황사영의 ‘기억’은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전유되었고, 더 나아가 기억의 전복으로까지 이어졌다.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