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된 전직 경영학 교수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너 자신을 위한 목표들, 고귀한 목표를 세워라. 그리고 그것들을 추구하며 파멸하라. 위대하고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며 파멸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을 나는 알지 못한다. 위대한 영혼은 아낌없이 탕진한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유고>에 나오는 말입니다. 어찌 보면 니체의 철학은 겁 없는 청년을 위한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니까요. 이전에 지녔고 심지어 지금도 은근히 버리지 않고 있는 꿈과 목표에 훨씬 못 미치는 삶을 감내하는 것. 그러니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현실과 타협하며 원했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을 체념하며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른이 되어 뒤늦게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공부가 깊어도 학위 하나 주지 않는 제도권 밖 인문학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왜 쓸모도 없는 공부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일까요?

얼마 전,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어느 분에게서 메일을 받았습니다. 일이 바쁜지 걸핏하면 강의를 놓쳐 녹화 영상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분이었습니다. 메일이 담고 있는 것은 그가 어느 미술관에서 열고 있는 개인전의 동영상이었습니다. 작가는 영상에서, 수십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열정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가가 누구인지 검색해 보았지요. 그는 몇 해 전, 정년을 10년이나 앞두고 퇴직한 전직 경영학 교수였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어렵게 교수가 되고 나서도 이건 아니라며 끊임없이 고민하다 급기야 철학하는 삶을 살겠다며 학교에서 나왔다고 했지요. 철학을 공부하다 보니 미학 쪽으로 관심이 갔고 그러다 느닷없이 그림이 그려져 운명처럼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는 교수로 지내던 제도권 안에서의 삶과 화가로 살아가는 제도권 밖에서의 삶이 확연히 다르다고 했습니다. 교수로서의 삶이 그에 걸맞은 생각과 역할과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화가로서의 그것은 이런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원하는 세계 속으로 제한 없이 자신을 끌고 들어가며 감각들과 상상력이 살아나 펄떡이는 삶. 그는 영상에서 관객들에게 이런 취지로 말했습니다.

“나는 예술가이지만 예술보다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예술은 삶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내 예술은 내가 살아낸 것을 담으며 그만큼의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예술은 자신의 삶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삶을 예술화하고 있었습니다.

찾아보면 공동체에는 일찌감치 직장을 팽개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적잖은 연봉을 받는 은행에서 사직한 뒤 해마다 개인전을 여는 가난한 화가가 있는가 하면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앞날이 보이지 않는 인문학 연구자가 된 학자도 있습니다. 불안정한 작가의 길을 시작한 이들도 여럿입니다.

이들이 공동체에서 하는 공부는 대개 강력한 ‘주입식’입니다. 여기서 주입식은 주어진 내용을 무조건 암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뒤늦게 공부한 난해한 개념과 이론으로 잘난 척하겠다는 것도, 누군가를 가르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공부한 것들을 가슴에 새겨넣고 몸으로 이를 살아내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다른 삶이, 쉬울 리 없습니다. 자신을 향한 목표, 고귀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추구하다 파멸하라는 니체의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겁니다.

어른이 되어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나이가 들며 잃었던 꿈을 되살려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다시 믿게 된 것들을 몸을 던져 추구하며 포기하다시피 했던 삶을 추슬러 다시 한번 제대로 살아내겠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일어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끝내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곳은 봉우리가 아니라 길입니다. 인문학 공동체는 뒤늦게 길을 걷는 이들이 주고받는, 길 이야기로 가득한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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